인생은 비어 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문학이야기|2009. 11. 11. 09:05

인생은 비어 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이외수


바다는
허무의 무덤이다
진실은 아름답지만
왜 언제나 해명되지 않은 채로
상처를 남기는지 바다는 말해 주지 않는다

빌어먹을 낭만이여
한잔의 술이
한잔의 하늘이 되는 줄을 나는 몰랐다
젊은 날에는
가끔씩 술잔 속에
파도가 일어서고
나는 어두운 골목 똥물까지 토한 채 잠이 들었다

소문으로만 출렁거리는
바다 곁에서
이따금 술에 취하면
담벼락에 어른거리던
나무들의 그림자
나무들의 그림자를 부여잡고
나는 울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리석다

바다에 가도 만날 수 없고
거리를 방황해도 만날 수 없다
단지 고개를 돌리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시간의 발굽소리
나는 왜 아직도 세속을 떠나지 못했을까

비를 기다리며 술을 마셨다
인생은
비어 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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