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필하모니의 북한공연실황 [New York Philharmonic in DPRK North Korea ]

유용한정보|2008. 2. 28. 05:23
뉴욕필하모니의 북한공연실황 [New York Philharmonic in DPRK North Korea ]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6일 오후 6시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역사적인 연주회를 가졌다. 국내에서도 여러차례 무대에 선 바 있는 로린 마젤이 지휘봉을 잡은 이날 공연에서 뉴욕필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을 비롯해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등 미국 색채가 강한 3개의 클래식 곡을 차례로 연주했다. '신세계 교향곡'은 체코의 국민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대한 감흥을 담았다는 점에서, '파리의 미국인'은 미국의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즈 작곡가 거슈윈의 흥겨운 클래식 곡이라는 점에서 이채를 띠었다. 북측은 뉴욕필의 선곡에 전혀 토를 달지 않고 이들 레퍼토리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뉴욕필이 본공연에 앞서 북한 국가인 '애국가'(박세영 작사·김원균 작곡)를 연주하고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북한 전역에 울려퍼졌다는 사실도 놀랍다. 북한 당국은 뉴욕필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을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뉴욕필은 이밖에도 레너드 번스타인의 '캔디드'와 한민족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해 북한 관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MBC TV와 독일 아르테 TV를 통해 한국은 물론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전세계에 실황 중계됐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공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음악을 위해 여기에 왔다"면서 "뉴욕필의 평양 공연은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공연에는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을 비롯해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최문순 MBC 사장 등 남측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평양 공연을 마친 뉴욕필은 28일 오후 1시30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을 위해 27일 오후 아시아나항공 특별기편으로 평양을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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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필하모니의 북한공연실황 [New York Philharmonic in DPRK North Korea ]

유용한정보|2008. 2. 28. 05:23
뉴욕필하모니의 북한공연실황 [New York Philharmonic in DPRK North Korea ]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26일 오후 6시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역사적인 연주회를 가졌다. 국내에서도 여러차례 무대에 선 바 있는 로린 마젤이 지휘봉을 잡은 이날 공연에서 뉴욕필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3막 전주곡을 비롯해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 등 미국 색채가 강한 3개의 클래식 곡을 차례로 연주했다. '신세계 교향곡'은 체코의 국민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미국에 대한 감흥을 담았다는 점에서, '파리의 미국인'은 미국의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즈 작곡가 거슈윈의 흥겨운 클래식 곡이라는 점에서 이채를 띠었다. 북측은 뉴욕필의 선곡에 전혀 토를 달지 않고 이들 레퍼토리를 흔쾌하게 받아들였다는 후문이다.



뉴욕필이 본공연에 앞서 북한 국가인 '애국가'(박세영 작사·김원균 작곡)를 연주하고 미국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가 북한 전역에 울려퍼졌다는 사실도 놀랍다. 북한 당국은 뉴욕필의 역사적인 평양 공연을 라디오로 전국에 생중계했다. 뉴욕필은 이밖에도 레너드 번스타인의 '캔디드'와 한민족의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앙코르 곡으로 연주해 북한 관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MBC TV와 독일 아르테 TV를 통해 한국은 물론 중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전세계에 실황 중계됐다.



지휘자 로린 마젤은 공연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음악을 위해 여기에 왔다"면서 "뉴욕필의 평양 공연은 변화를 이끄는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공연에는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을 비롯해 박성철 신원그룹 회장,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 김성태 대우증권 사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최문순 MBC 사장 등 남측 인사들도 대거 참석했다.



평양 공연을 마친 뉴욕필은 28일 오후 1시30분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 공연을 위해 27일 오후 아시아나항공 특별기편으로 평양을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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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자동차 '벤츠 S600 '

유용한정보|2008. 2. 27. 18:25
1.
노前대통령 전용차량 '벤츠 S600'의 성능은?
수류탄 등 피폭에도 안전…유사시 위한 위성통신 핫라인 갖춰


노무현 대통령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에 이용한 차량은 국가원수용 방탄차로 주문제작된 벤츠 S600이다.

이 차는 국가원수가 이용하는 차량인 만큼 폭발물의 위협 등에 견디고 펑크가 나도 주행이 가능하도록 특수제작됐다.

노대통령이 이용하는 벤츠S600은 유로 표준인 B6/B7 레벨(Highest Protection)에 상응하는 안전성을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수류탄이나 그밖에 폭발물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4개의 문도 보통 차와는 다른 잠금장치와 이음매 때문에 각각 100kg 이상 무게가 나가며 유리 역시 방탄 유리이다.
또 기관총 사격과 독가스·세균 등 화생방 무기를 막을 수 있는며 자체 산소공급 장치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차는 또 특수합금과 강화유리 등을 사용해 무게가 양산용보다 1.5톤 이상 더 무거우며 타이어가 터져도 시속 80~100km로 달릴 수 있다.

이밖에 화재 공격 때 작동되는 스프링쿨러시스템과 발사체가 연료탱크에 접촉할 때 연료탱크가 자동으로 폐쇄되는 기능에다 유사시 서울과 연락이 가능한 위성통신장비도 갖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차는 5.5ℓ V12 엔진에 최고출력 517마력, 최고안전속도는 210㎞/h이며 양산차 가격인 2억6천여만원보다 수억원 더 비싼 것으로 알려졌다.



2.
이명박대통령의 '벤츠 S600 가드' 벗겨보니

4.8초면 시속 100km '슈퍼카'·화재공격땐 스프링클러 작동



메르세데스-벤츠의 'S600 가드'가 기존 기아자동차의 '카니발'을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의 가드로 전면에 나섰다. 지난 20일부터 업무(?)를 시작한 S600 가드는 그 동안 주차장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특수 방호차량인 벤츠 S600 가드를 비롯해 GM의 캐딜락 드빌 리무진, 포드의 링컨 컨티넨털, BMW Security 760Li 등의 전용차량을 이용하게 된다. 벤츠 S600 가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공식 의전 차량으로 쓰여왔다.

양산이 아닌 주문제작된 것으로 특수합금 재질의 몸체에 방탄유리로 뒤덮였다. 차량 문짝 한 개의 무게만도 100kg이 넘어 총 3700kg에 달한다. 전장은 5m가 넘는다. 타이어 역시 방탄 타이어로, 4개가 한꺼번에 터져도 시속 80~100km로 달릴 수 있다.
 


엔진 배기량은 6000cc로 국내 수입 승용차 중 최고 수준이다. V12 트윈 터보 엔진으로 517마력에 84.5kg.m의 토크를 보인다. 정지에서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시간은 4.8초로 슈퍼카 급이다. 최고 속도는 시속 250km.

생화학 가스 공격에 대비해 공기 흡입구에 산소 공급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화재 공격 때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작동되고 소형 미사일이 터지면 연료탱크가 자동으로 폐쇄돼 2차폭발을 방지한다. 또한 사고 때 8개의 에어백이 2단계로 펼쳐져 탑승자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벤츠 S600 가드'의 핸들은 이 대통령의 차를 10년 가까이 몰아온 신용구씨가 3주간의 경호운전 교육을 마친 후 잡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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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자동차 '벤츠 S600 '

유용한정보|2008. 2. 27. 18:25
1.
노前대통령 전용차량 '벤츠 S600'의 성능은?
수류탄 등 피폭에도 안전…유사시 위한 위성통신 핫라인 갖춰


노무현 대통령이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에 이용한 차량은 국가원수용 방탄차로 주문제작된 벤츠 S600이다.

이 차는 국가원수가 이용하는 차량인 만큼 폭발물의 위협 등에 견디고 펑크가 나도 주행이 가능하도록 특수제작됐다.

노대통령이 이용하는 벤츠S600은 유로 표준인 B6/B7 레벨(Highest Protection)에 상응하는 안전성을 갖추고 있다.

이에 따라 수류탄이나 그밖에 폭발물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4개의 문도 보통 차와는 다른 잠금장치와 이음매 때문에 각각 100kg 이상 무게가 나가며 유리 역시 방탄 유리이다.
또 기관총 사격과 독가스·세균 등 화생방 무기를 막을 수 있는며 자체 산소공급 장치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차는 또 특수합금과 강화유리 등을 사용해 무게가 양산용보다 1.5톤 이상 더 무거우며 타이어가 터져도 시속 80~100km로 달릴 수 있다.

이밖에 화재 공격 때 작동되는 스프링쿨러시스템과 발사체가 연료탱크에 접촉할 때 연료탱크가 자동으로 폐쇄되는 기능에다 유사시 서울과 연락이 가능한 위성통신장비도 갖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차는 5.5ℓ V12 엔진에 최고출력 517마력, 최고안전속도는 210㎞/h이며 양산차 가격인 2억6천여만원보다 수억원 더 비싼 것으로 알려졌다.



2.
이명박대통령의 '벤츠 S600 가드' 벗겨보니

4.8초면 시속 100km '슈퍼카'·화재공격땐 스프링클러 작동



메르세데스-벤츠의 'S600 가드'가 기존 기아자동차의 '카니발'을 대신해 이명박 대통령의 가드로 전면에 나섰다. 지난 20일부터 업무(?)를 시작한 S600 가드는 그 동안 주차장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특수 방호차량인 벤츠 S600 가드를 비롯해 GM의 캐딜락 드빌 리무진, 포드의 링컨 컨티넨털, BMW Security 760Li 등의 전용차량을 이용하게 된다. 벤츠 S600 가드는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 공식 의전 차량으로 쓰여왔다.

양산이 아닌 주문제작된 것으로 특수합금 재질의 몸체에 방탄유리로 뒤덮였다. 차량 문짝 한 개의 무게만도 100kg이 넘어 총 3700kg에 달한다. 전장은 5m가 넘는다. 타이어 역시 방탄 타이어로, 4개가 한꺼번에 터져도 시속 80~100km로 달릴 수 있다.
 


엔진 배기량은 6000cc로 국내 수입 승용차 중 최고 수준이다. V12 트윈 터보 엔진으로 517마력에 84.5kg.m의 토크를 보인다. 정지에서 시속 100km에 도달하는 시간은 4.8초로 슈퍼카 급이다. 최고 속도는 시속 250km.

생화학 가스 공격에 대비해 공기 흡입구에 산소 공급 시스템도 갖춰져 있다. 화재 공격 때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작동되고 소형 미사일이 터지면 연료탱크가 자동으로 폐쇄돼 2차폭발을 방지한다. 또한 사고 때 8개의 에어백이 2단계로 펼쳐져 탑승자를 안전하게 보호한다.

'벤츠 S600 가드'의 핸들은 이 대통령의 차를 10년 가까이 몰아온 신용구씨가 3주간의 경호운전 교육을 마친 후 잡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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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를 쌩쌩 돌게하는 체크 포인트 10가지

유용한정보|2008. 2. 27. 17:46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사전에 에러는 없다" 라고 뽐낼 정도로 잘 나가던 PC가 요즘 비실비실 힘을 쓰지 못한다.
이럴 때 애꿎은 PC 탓만 할 게 아니라 PC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 휴지통과 지운편지함 버려진 파일로 가득 차 있고 바탕화면에는 '바로가기 아이콘' 들이 널려 있어 PC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다. 이것들만 정리해도 PC가 한결 가벼워진다.
오래된 백신 프로그램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막아내질 못하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업데이트 해줘야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다. 시작프로그램 폴더에 꼭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싹 날려버리면 부팅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날 잡아서 레지스트리를 말끔히 청소하고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하는 디스크 검사도 때때로 해줘야 하드디스크가 삐걱거리지 않는다.
 
PC를 쌩쌩 돌게 만드는 10가지 체크 포인트를 짚어보자.


하나! 휴지통을 청소하자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하다면 제일 먼저 휴지통을 비운다. 윈도우즈에서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을 지우면 바로 없어지지 않고 우선 휴지통에 담는다. 중요한 파일을 실수로 지우면 휴지통을 열고 '복원'메뉴를 고르면 파일을 되살릴 수 있다. 휴지통은 파일을 잘못 지웠을 때 요긴하게 쓰이지만 파일을 지우면 우선 휴지통을 거치기 때문에 파일을 지울때 속도가 더디고 하드디스크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휴지통을 자주 비우지 않으면 버린 파일로 가득 차 PC 속도가 떨어진다. 수시로 체크해 PC의 숨통을 트이게 하자.

▣ 휴지통 크기 조정하기

휴지통은 보통 하드디스크의 10%를 차지한다. 휴지통보다 큰 파일을 지우면 그 파일은 휴지통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없어진다. 휴지통 크기는 등록 정보 메뉴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바탕화면의 휴지통 아이콘에 마우스를 대고 오른쪽 버튼을 누른뒤 '등록정보'를 고른다. '휴지통의 최대 크기'를 보면 10%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을 원하는 크기로 바꾼다. 하드디스크의 여유공간이 없다면 휴지통 크기를 작게 잡는 것이 좋다.

둘! 지운 편지함을 비우자

아웃룩 익스프레스도 윈도우즈의 휴지통처럼 보호장치를 지녔다. 받은 편지함에서 지운것들이 지운 편지함에 다 모인다. "에잇! 메일 크기가 얼마나 한다고.."라고 할지 모르지만 메일에 첨부된 동영상이나 mp3파일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 하드디스크에 차곡차곡쌓이면 PC가 둔해진다. 필요없는 메일을 싹 버리자.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띄운 뒤 화면 왼쪽의 '지운 편지함'을 누르면 오른쪽에 지운 편지들이 보인다. 보관해야 할 편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지운 편지함'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른 뒤 '지운 편지함 폴더 비우기'를 누른다.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할 것인지 확인하는 메시지가 뜨면 '예' 버튼을 누른다.

셋! 레지스트리의 살을 뺀다

레지스트리는 윈도우즈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 데이터 베이스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 때마다 레지스트리에 그 정보를 등록하기 마련인데 프로그램을 지울 때는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때문에 레지스트리는 윈도우즈를 쓸수록 덩치가 커지고 지저분해진다.
윈도우즈에 기본적으로 들어 있는 regedit 툴을 이용해 레지스트리를 관리하지만 초보자들은 레지스트리를 만지기를 꺼린다. 레지스트리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초보자도 쉽게 다룰수 있다. (예 : 레지스트리 애널라이저 - 레지스트리에 들어 있는 정보와 실제 경로 정보가 일치하기 않는 부분을 찾아 지우게 해주는 국산분석프로그램이다.)

레지스트리는 잘못 만지면 윈도우즈에 치명적인 에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windir 폴더에 있는 sys-tem.dat와 user.dat를 백업해 놓아야 한다.

넷! 임시 폴더를 비우자

윈도우즈는 임시 폴더(c:windowstemp) 등 임시 저장 공간을 여럿 지녔다. 임시 폴더는 프로그램을 깔거나 압축 파일을 풀 때 잠시 하드디스크를 빌리는 공간이다. 주로 캐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문제나 비정상적으로 작업을 끝낼 때 임시 폴더에 들어있던 자료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 PC 속도를 떨어뜨린다. 임시 폴더에 있는 자료는 대부분 쓸모가 없으므로 바로 비워주는 것이 좋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디스크 정리를 누르면 드라이브 선택 창이 뜬다.
▼버튼을 눌러 정리할 드라이브를 고른 뒤 '확인'버튼을 누른다.

2.'제거할 파일' 칸에서 지울 파일을 체크하면 얼마의 공간을 얻을 수 있는 지 보여준다. 임시 인터넷 파일이나 임시 파일등 지울것을 체크하고 '확인'버튼을 눌러 임시 파일을 말끔히 날려 버린다.

▣ 캐시

컴퓨터 성능을 높이는 데 쓰는 고속 기억장치로서 주 기억 장치로 이용하는 메모리보다 접근 속도가 매우 빠른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에서 자주 쓰는 데이터와 명령어들을 주기억장치에서 읽어와 고속 캐시에 저장하면 정보를 불러올때 빨리 전달해 준다.

다섯! 시작프로그램을 줄이자

부팅 시간이 느리다면 시작 프로그램을 체크한다. 시작 버튼 -> 프로그램 -> 시작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들은 부팅할 때 저절로 떠서 메모리를 차지한다.
인터넷 접속 프로그램이나 메신저 프로그램 등은 항상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해 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자주쓰지않는 프로그램이 시작 프로그램의 자리를 차지해 윈도우즈 시작 속도를 느리게 한다. 또 트레이 아이콘에 등록되어 시스템 자원을 몰래 갉아 먹는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된 프로그램을 정리하자.

1. 시작버튼 -> 설정 -> 작업표시줄 및 시작 메뉴를 고른다. '시작 메뉴 프로그램' 탭을 고르고 '삭제' 버튼을 누른다.

2. 프로그램 -> 시작 프로그램을 열면 시작프로그램에 등록된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보인다. 꼭 필요한 것만 빼고 '삭제'버튼을 눌러 깨끗이 정리한다.

▣ 쓸모없는 트레이 아이콘 정리하기

시작버튼 -> 실행을 누른 뒤 msconfig를 쓰면 시스템 구성 유틸리티 창이 뜬다. '시작프로그램'탭을 고르면 시스템을 시작 할 때 수행되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뜬다.
자주 쓰는 시작 프로그램에만 체크하고 나머지는 체크를 없앤 뒤 '확인'버튼을 누른다. 이 중에서 쓸모없이 부팅시간만 늘리고 시스템 자원만 잡아먹는 것이 있다. 하지만 초보자는 어떤것을 지워야 할지 구분하기 힘들다. 윈도우즈를 깔끔하게 청소하려면 오른쪽 경로가 'c:program files'로 시작하는 모든 항목의 체크를 없애면 된다.
설정이 끝나면 재부팅을 한다. 부팅속도가 훨씬 빨라진것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주의 : TaskMonitor, System tray, Load Power Profile(2개), 레지스트리 검사 등은 지우면
안됩니다.)

여섯! 쓰지 않는 프로그램을 지우자

프로그램을 한 번 깔고 나서 다시 쓰지 않거나 날짜 제한이 있는 쉐어웨어라서 더 이상 쓸수 없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들은 시스템 성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바로 지워준다.
프로그램을 지울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 자체에 있는 언인스톨9제거0 프로그램으로 없애거나 시작 버튼 -> 설정 ->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제거를 이용한다. 그냥 설치된 폴더를 찾아서 지우면 프로그램 찌꺼기들이 레지스트리 파일이나 윈도우즈 폴더 속에 그대로 남는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을 눌러 쓰지 않느 ㄴ프로그램을 찾은 뒤 언인스톨 프로그램을 골라 깨끗이 지운다.

2. 언인스톨 프로그램이 없다면 시작 버튼 -> 설정 -> 제어판 ->프로그램 추가/제거를 고른 뒤 지우려는 프로그램을 찾아 마우스 왼쪽 버튼을 두번 누르거나 '추가/제거' 버튼을 누른다.

3. 프로그램 추가/제거 창에도 없다면 프로그램 폴더를 찾아서 지우는 방법 밖에 없다. 프로그램 등록정보를 눌러 프로그램이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윈도우즈 탐색기를 띄운다. 지우려는 프로그램에 마우스를 대고 오른쪽 버튼을 눌러 '삭제'를 골라 폴더 자체를 지운다.


일곱! 백신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자

"백신 프로그램을 깔아놨는데도 왜 바이러스에 감염돼지?"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은 새것으로 바꾸고 자주 업데이트해 바이러스에 견디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중에 치료를 해도 100% 되살아 나지 않는다. 따라서 찝찝한 기분에 윈도우즈를 다시 까는 일이 종종 있다. 바이러스는 치료보다 예방이 먼저다.

작년 한해 동안 새로 생긴 바이러스가 300개를 넘을 정도로 컴퓨터 바이러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과 이전의 것이 변종되어 나온다. 처음 살 때 깐 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만 계속 쓰다가는 바이러스에 걸리기 쉽다. 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최신 데이터로 업데이트 해주는 것이 좋다. 바이러스프로그램에 따라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프로그램 자체를 다시 내려 받아야 하는 것이 있고 핵심이 되는 엔진만 다시 내려 받는 것이 있다. 대부분은 백신프로그램 개발 업체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 할 때 마다 인터넷에 올려 알아서 업데이트 해준다.

V3Pro 2000 Deluxe 업데이트 하기
'V3Pro2000 Deluxe'라는 백신프로그램을 쓰는 사람은 '스마트 업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쓰면 최신 바이러스 데이터로 간단히 업데이트 할수 있다. 시작 버튼 -> 프로그램 -> V3Pro2000 Deluxe -> 스마트 업데이트를 고른다. 스마트 업데이트 창에서 '업데이트 시작'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저절로 업데이트 된다.(필자는 정품을 애용합니당~*^^*)

V3+NEO 업데이트 하기
V3+NEO 백신프로그램은 인터넷이나 PC통신(천리안, 하이텔, 유니텔,나우누리)의 안철수연구소 포럼(Go ahn), 공개자료실 등에서 내려 받을수 있다.
안철수 연구소 웹사이트나 자료실에 들어간 뒤 최신버전의 백신을 받아서 이전에 프로그램을 깐 폴더에 덮어 씌운다.


여덟! 바로 가기 아이콘을 정리하자

윈도우즈를 편하게 쓸수 있는 명령 중의 하나가 '바로가기 아이콘'이다. 바로 가기 아이콘을 이용하면 프로그램이 있는 폴더를 열지 않아도 바탕화면에서 바로 띄울 수 있다.
하지만 PC를 오래 쓰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바탕화면에 '바로가기아이콘'이 늘어난다. 프로그램을 깔 때 '바로 가기 아이콘'을 바탕화면에 깔 것인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그냥 넘어가버리기 때문이다.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하나 늘 때마다 1,000바이트 정도의 리소스를 쓴다. 바탕화면에 바로 가기 아이콘이 많이 널려 있으면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 필요한 메모리가 줄어 들어 "리소스가 부족해 파일을 열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기도 한다. 바탕화면의 바로 가기 아이콘과 화면 오른쪽 아래 트레이에 등록된 아이콘을 줄이면 컴퓨터에 탄력이 생긴다. 바로 가기 아이콘을 지워도 실제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바로 가기 아이콘'중에 지울 것을 고른 뒤 Shift + Del 키를 눌러 바로 삭제하자.


아홉! 디스크를 검사한다

비정상적으로 컴퓨터를 끄거나 프로그램에 에러가 생겨 디스크가 삐걱거리면 특정 디렉토리나 파일이 지워지지 않거나 프로그램이 불안정하게 수행된다.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하는 하드디스크의 건가을 지키려면 가끔 디스크 검사를 해야 한다. 파일을 저장하거나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 에러가 자주 생기거나 탐색기에서 보이는 폴더 구조가 깨질 때 디스크 검사를 하면 하드디스크 성능이 한결 좋아진다.
윈도우즈에 있는 '디스크 검사'를 이용해 한 달에 한번은 디스크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본다.

1. 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 디스크 검사를 눌러 디스크 검사 창을 띄운다. 검사할 디스크 드라이브와 검사 유형을 정한 뒤 '고급'버튼을 누른다.

▣ 검사유형

표준 검사는 디스크의 파일과 폴더만 검사하고 정밀 검사는 디스크 자체의 결함까지 살핀다. 정밀검사를 고르면 자세하게 검사해주기 때문에 더 좋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주로 표준 검사를 한다. 아래의 '오류자동수정'을 체크하면 검색하는 동안에 오류가 생겨도 알아서 수정한다.

2. 손실된 파일 조각이 있을 때 그것을 일부분이라도 되살려 파일로 만들것인지, 아예 지울것인지 정해야 한다. 일부분을 되살린 파일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손실된 파일 조각 칸의 '삭제'를 체크한다.

3. 디스크 검사 고급 옵션 창의 '확인' 버튼을 누른뒤 디스크 검사 창에서 '시작'버튼을 누르면 검사를 시작한다.


열! 디스크 조각모음을 한다.

디스크 조각 모음도 가끔 해준다.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저장하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면 디스크 곳곳에 빈 공간이 생기거나 파일이 여러 곳에 흩어져 저장된다. 이것은 파일이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파일이 다 들어가지 못할 때 나누어져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데이터를 불러오거나 저장하는 속도가 더디고 파일이 엉켜 에러가 생긴다. '디스크 조각 모음'메뉴를 이용해서 파일들의 위치를 다시 배열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자. 그렇다고 너무 자주 하는것도 좋지 않다. 한번 조각 모음을 할 때마다 하드디스크는 엄청난 자료 이동에 시달린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디스크 검사를 먼저 한 다음에 한다.
하드디스크에 에러가 있는 채로 조각모음을 할 동안은 다른 프로그램을 끄고 가만히 둔다. 아니면 하드디스크의 내용이 바뀌어서 조각 모음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잠시 PC를 떠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 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 디스크 조각모음을 누른다. 드라이브 선택 창이 뜨면 '설정' 버튼을 누른다.

2. '프로그램의 시작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파일을 재정렬'을 체크하고 '확인'버튼을 누르면 조각 모음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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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를 쌩쌩 돌게하는 체크 포인트 10가지

유용한정보|2008. 2. 2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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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전에 에러는 없다" 라고 뽐낼 정도로 잘 나가던 PC가 요즘 비실비실 힘을 쓰지 못한다.
이럴 때 애꿎은 PC 탓만 할 게 아니라 PC속을 찬찬히 들여다
보자. 휴지통과 지운편지함 버려진 파일로 가득 차 있고 바탕화면에는 '바로가기 아이콘' 들이 널려 있어 PC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다. 이것들만 정리해도 PC가 한결 가벼워진다.
오래된 백신 프로그램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막아내질 못하니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업데이트 해줘야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다. 시작프로그램 폴더에 꼭 필요한 것만 남겨두고
싹 날려버리면 부팅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진다. 날 잡아서 레지스트리를 말끔히 청소하고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하는 디스크 검사도 때때로 해줘야 하드디스크가 삐걱거리지 않는다.
 
PC를 쌩쌩 돌게 만드는 10가지 체크 포인트를 짚어보자.


하나! 휴지통을 청소하자

하드디스크 용량이 부족하다면 제일 먼저 휴지통을 비운다. 윈도우즈에서 하드디스크에 있는 파일을 지우면 바로 없어지지 않고 우선 휴지통에 담는다. 중요한 파일을 실수로 지우면 휴지통을 열고 '복원'메뉴를 고르면 파일을 되살릴 수 있다. 휴지통은 파일을 잘못 지웠을 때 요긴하게 쓰이지만 파일을 지우면 우선 휴지통을 거치기 때문에 파일을 지울때 속도가 더디고 하드디스크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휴지통을 자주 비우지 않으면 버린 파일로 가득 차 PC 속도가 떨어진다. 수시로 체크해 PC의 숨통을 트이게 하자.

▣ 휴지통 크기 조정하기

휴지통은 보통 하드디스크의 10%를 차지한다. 휴지통보다 큰 파일을 지우면 그 파일은 휴지통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없어진다. 휴지통 크기는 등록 정보 메뉴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바탕화면의 휴지통 아이콘에 마우스를 대고 오른쪽 버튼을 누른뒤 '등록정보'를 고른다. '휴지통의 최대 크기'를 보면 10%로 설정되어 있다. 이것을 원하는 크기로 바꾼다. 하드디스크의 여유공간이 없다면 휴지통 크기를 작게 잡는 것이 좋다.

둘! 지운 편지함을 비우자

아웃룩 익스프레스도 윈도우즈의 휴지통처럼 보호장치를 지녔다. 받은 편지함에서 지운것들이 지운 편지함에 다 모인다. "에잇! 메일 크기가 얼마나 한다고.."라고 할지 모르지만 메일에 첨부된 동영상이나 mp3파일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 하드디스크에 차곡차곡쌓이면 PC가 둔해진다. 필요없는 메일을 싹 버리자.
아웃룩 익스프레스를 띄운 뒤 화면 왼쪽의 '지운 편지함'을 누르면 오른쪽에 지운 편지들이 보인다. 보관해야 할 편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지운 편지함'을 마우스 오른쪽 버튼을 누른 뒤 '지운 편지함 폴더 비우기'를 누른다.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할 것인지 확인하는 메시지가 뜨면 '예' 버튼을 누른다.

셋! 레지스트리의 살을 뺀다

레지스트리는 윈도우즈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는 데이터 베이스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 때마다 레지스트리에 그 정보를 등록하기 마련인데 프로그램을 지울 때는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는다. 때문에 레지스트리는 윈도우즈를 쓸수록 덩치가 커지고 지저분해진다.
윈도우즈에 기본적으로 들어 있는 regedit 툴을 이용해 레지스트리를 관리하지만 초보자들은 레지스트리를 만지기를 꺼린다. 레지스트리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초보자도 쉽게 다룰수 있다. (예 : 레지스트리 애널라이저 - 레지스트리에 들어 있는 정보와 실제 경로 정보가 일치하기 않는 부분을 찾아 지우게 해주는 국산분석프로그램이다.)

레지스트리는 잘못 만지면 윈도우즈에 치명적인 에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windir 폴더에 있는 sys-tem.dat와 user.dat를 백업해 놓아야 한다.

넷! 임시 폴더를 비우자

윈도우즈는 임시 폴더(c:windowstemp) 등 임시 저장 공간을 여럿 지녔다. 임시 폴더는 프로그램을 깔거나 압축 파일을 풀 때 잠시 하드디스크를 빌리는 공간이다. 주로 캐시 역할을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문제나 비정상적으로 작업을 끝낼 때 임시 폴더에 들어있던 자료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 PC 속도를 떨어뜨린다. 임시 폴더에 있는 자료는 대부분 쓸모가 없으므로 바로 비워주는 것이 좋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디스크 정리를 누르면 드라이브 선택 창이 뜬다.
▼버튼을 눌러 정리할 드라이브를 고른 뒤 '확인'버튼을 누른다.

2.'제거할 파일' 칸에서 지울 파일을 체크하면 얼마의 공간을 얻을 수 있는 지 보여준다. 임시 인터넷 파일이나 임시 파일등 지울것을 체크하고 '확인'버튼을 눌러 임시 파일을 말끔히 날려 버린다.

▣ 캐시

컴퓨터 성능을 높이는 데 쓰는 고속 기억장치로서 주 기억 장치로 이용하는 메모리보다 접근 속도가 매우 빠른다.
이를테면 프로그램에서 자주 쓰는 데이터와 명령어들을 주기억장치에서 읽어와 고속 캐시에 저장하면 정보를 불러올때 빨리 전달해 준다.

다섯! 시작프로그램을 줄이자

부팅 시간이 느리다면 시작 프로그램을 체크한다. 시작 버튼 -> 프로그램 -> 시작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들은 부팅할 때 저절로 떠서 메모리를 차지한다.
인터넷 접속 프로그램이나 메신저 프로그램 등은 항상 쓰는 것이기 때문에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해 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자주쓰지않는 프로그램이 시작 프로그램의 자리를 차지해 윈도우즈 시작 속도를 느리게 한다. 또 트레이 아이콘에 등록되어 시스템 자원을 몰래 갉아 먹는다. 이런 일을 막으려면 시작 프로그램에 등록된 프로그램을 정리하자.

1. 시작버튼 -> 설정 -> 작업표시줄 및 시작 메뉴를 고른다. '시작 메뉴 프로그램' 탭을 고르고 '삭제' 버튼을 누른다.

2. 프로그램 -> 시작 프로그램을 열면 시작프로그램에 등록된 프로그램들이 줄줄이 보인다. 꼭 필요한 것만 빼고 '삭제'버튼을 눌러 깨끗이 정리한다.

▣ 쓸모없는 트레이 아이콘 정리하기

시작버튼 -> 실행을 누른 뒤 msconfig를 쓰면 시스템 구성 유틸리티 창이 뜬다. '시작프로그램'탭을 고르면 시스템을 시작 할 때 수행되는 모든 프로그램들이 뜬다.
자주 쓰는 시작 프로그램에만 체크하고 나머지는 체크를 없앤 뒤 '확인'버튼을 누른다. 이 중에서 쓸모없이 부팅시간만 늘리고 시스템 자원만 잡아먹는 것이 있다. 하지만 초보자는 어떤것을 지워야 할지 구분하기 힘들다. 윈도우즈를 깔끔하게 청소하려면 오른쪽 경로가 'c:program files'로 시작하는 모든 항목의 체크를 없애면 된다.
설정이 끝나면 재부팅을 한다. 부팅속도가 훨씬 빨라진것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주의 : TaskMonitor, System tray, Load Power Profile(2개), 레지스트리 검사 등은 지우면
안됩니다.)

여섯! 쓰지 않는 프로그램을 지우자

프로그램을 한 번 깔고 나서 다시 쓰지 않거나 날짜 제한이 있는 쉐어웨어라서 더 이상 쓸수 없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들은 시스템 성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바로 지워준다.
프로그램을 지울 때는 반드시 프로그램 자체에 있는 언인스톨9제거0 프로그램으로 없애거나 시작 버튼 -> 설정 -> 제어판 -> 프로그램 추가/제거를 이용한다. 그냥 설치된 폴더를 찾아서 지우면 프로그램 찌꺼기들이 레지스트리 파일이나 윈도우즈 폴더 속에 그대로 남는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을 눌러 쓰지 않느 ㄴ프로그램을 찾은 뒤 언인스톨 프로그램을 골라 깨끗이 지운다.

2. 언인스톨 프로그램이 없다면 시작 버튼 -> 설정 -> 제어판 ->프로그램 추가/제거를 고른 뒤 지우려는 프로그램을 찾아 마우스 왼쪽 버튼을 두번 누르거나 '추가/제거' 버튼을 누른다.

3. 프로그램 추가/제거 창에도 없다면 프로그램 폴더를 찾아서 지우는 방법 밖에 없다. 프로그램 등록정보를 눌러 프로그램이 있는 곳을 알아낸 다음 윈도우즈 탐색기를 띄운다. 지우려는 프로그램에 마우스를 대고 오른쪽 버튼을 눌러 '삭제'를 골라 폴더 자체를 지운다.


일곱! 백신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하자

"백신 프로그램을 깔아놨는데도 왜 바이러스에 감염돼지?"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은 새것으로 바꾸고 자주 업데이트해 바이러스에 견디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나중에 치료를 해도 100% 되살아 나지 않는다. 따라서 찝찝한 기분에 윈도우즈를 다시 까는 일이 종종 있다. 바이러스는 치료보다 예방이 먼저다.

작년 한해 동안 새로 생긴 바이러스가 300개를 넘을 정도로 컴퓨터 바이러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과 이전의 것이 변종되어 나온다. 처음 살 때 깐 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만 계속 쓰다가는 바이러스에 걸리기 쉽다. 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바이러스 프로그램의 최신 데이터로 업데이트 해주는 것이 좋다. 바이러스프로그램에 따라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다.

프로그램 자체를 다시 내려 받아야 하는 것이 있고 핵심이 되는 엔진만 다시 내려 받는 것이 있다. 대부분은 백신프로그램 개발 업체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 할 때 마다 인터넷에 올려 알아서 업데이트 해준다.

V3Pro 2000 Deluxe 업데이트 하기
'V3Pro2000 Deluxe'라는 백신프로그램을 쓰는 사람은 '스마트 업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쓰면 최신 바이러스 데이터로 간단히 업데이트 할수 있다. 시작 버튼 -> 프로그램 -> V3Pro2000 Deluxe -> 스마트 업데이트를 고른다. 스마트 업데이트 창에서 '업데이트 시작'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저절로 업데이트 된다.(필자는 정품을 애용합니당~*^^*)

V3+NEO 업데이트 하기
V3+NEO 백신프로그램은 인터넷이나 PC통신(천리안, 하이텔, 유니텔,나우누리)의 안철수연구소 포럼(Go ahn), 공개자료실 등에서 내려 받을수 있다.
안철수 연구소 웹사이트나 자료실에 들어간 뒤 최신버전의 백신을 받아서 이전에 프로그램을 깐 폴더에 덮어 씌운다.


여덟! 바로 가기 아이콘을 정리하자

윈도우즈를 편하게 쓸수 있는 명령 중의 하나가 '바로가기 아이콘'이다. 바로 가기 아이콘을 이용하면 프로그램이 있는 폴더를 열지 않아도 바탕화면에서 바로 띄울 수 있다.
하지만 PC를 오래 쓰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바탕화면에 '바로가기아이콘'이 늘어난다. 프로그램을 깔 때 '바로 가기 아이콘'을 바탕화면에 깔 것인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그냥 넘어가버리기 때문이다.

바탕화면에 아이콘이 하나 늘 때마다 1,000바이트 정도의 리소스를 쓴다. 바탕화면에 바로 가기 아이콘이 많이 널려 있으면 프로그램을 돌리는 데 필요한 메모리가 줄어 들어 "리소스가 부족해 파일을 열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뜨기도 한다. 바탕화면의 바로 가기 아이콘과 화면 오른쪽 아래 트레이에 등록된 아이콘을 줄이면 컴퓨터에 탄력이 생긴다. 바로 가기 아이콘을 지워도 실제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바로 가기 아이콘'중에 지울 것을 고른 뒤 Shift + Del 키를 눌러 바로 삭제하자.


아홉! 디스크를 검사한다

비정상적으로 컴퓨터를 끄거나 프로그램에 에러가 생겨 디스크가 삐걱거리면 특정 디렉토리나 파일이 지워지지 않거나 프로그램이 불안정하게 수행된다.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저장하는 하드디스크의 건가을 지키려면 가끔 디스크 검사를 해야 한다. 파일을 저장하거나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 에러가 자주 생기거나 탐색기에서 보이는 폴더 구조가 깨질 때 디스크 검사를 하면 하드디스크 성능이 한결 좋아진다.
윈도우즈에 있는 '디스크 검사'를 이용해 한 달에 한번은 디스크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본다.

1. 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 디스크 검사를 눌러 디스크 검사 창을 띄운다. 검사할 디스크 드라이브와 검사 유형을 정한 뒤 '고급'버튼을 누른다.

▣ 검사유형

표준 검사는 디스크의 파일과 폴더만 검사하고 정밀 검사는 디스크 자체의 결함까지 살핀다. 정밀검사를 고르면 자세하게 검사해주기 때문에 더 좋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주로 표준 검사를 한다. 아래의 '오류자동수정'을 체크하면 검색하는 동안에 오류가 생겨도 알아서 수정한다.

2. 손실된 파일 조각이 있을 때 그것을 일부분이라도 되살려 파일로 만들것인지, 아예 지울것인지 정해야 한다. 일부분을 되살린 파일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손실된 파일 조각 칸의 '삭제'를 체크한다.

3. 디스크 검사 고급 옵션 창의 '확인' 버튼을 누른뒤 디스크 검사 창에서 '시작'버튼을 누르면 검사를 시작한다.


열! 디스크 조각모음을 한다.

디스크 조각 모음도 가끔 해준다. 하드디스크에 파일을 저장하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면 디스크 곳곳에 빈 공간이 생기거나 파일이 여러 곳에 흩어져 저장된다. 이것은 파일이 지워진 자리에 새로운 파일이 다 들어가지 못할 때 나누어져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데이터를 불러오거나 저장하는 속도가 더디고 파일이 엉켜 에러가 생긴다. '디스크 조각 모음'메뉴를 이용해서 파일들의 위치를 다시 배열해 시스템의 효율을 높이자. 그렇다고 너무 자주 하는것도 좋지 않다. 한번 조각 모음을 할 때마다 하드디스크는 엄청난 자료 이동에 시달린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디스크 검사를 먼저 한 다음에 한다.
하드디스크에 에러가 있는 채로 조각모음을 할 동안은 다른 프로그램을 끄고 가만히 둔다. 아니면 하드디스크의 내용이 바뀌어서 조각 모음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잠시 PC를 떠나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다.

1.시작버튼 -> 프로그램 -> 보조 프로그램 -> 시스템 도구 -> 디스크 조각모음을 누른다. 드라이브 선택 창이 뜨면 '설정' 버튼을 누른다.

2. '프로그램의 시작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파일을 재정렬'을 체크하고 '확인'버튼을 누르면 조각 모음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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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동영상 다운로드, 컨버팅, 동영상올리기

유용한정보|2008. 2. 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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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엔캐스트(mncast) ucc, 다음tv팟, 네이버, 태그스토리, 판도라TV, 풀빵, 프리첼,
디오데오,UCCC 싸이월드 동영상아,아이플아우라, 엠군 등등
동영상을 다운로드하는 방법을 알아 봅시다.
 

일반적으로 주소를 찾아내서 다운로드하고 컨버팅하여 올리는것이 동영상 작업의 기본 입니다만
UCC 동영상의 경우 URL Snooper나 Net Transport, UCC다잡아 등 번거롭게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주소를 찾아내고 따로 다운받는 등의 작업이 필요없습니다.


절차 요약

1.  먼저 첨부한 컨버팅 프로그램 설치을 설치 합니다.

                                                        다운하여 zip파일을 새폴더에 풀어줍니다.


2.  다운받을 동영상이 있는 UCC 페이지로 갑니다.

3. 익스폴로러 --> 도구 --> 인터넷옵션 --> 쿠키삭제 --> 파일삭제 (오프라인항목도 삭제)

4.  동영상을 플레이 합니다.

5.  중간에 끊지 마시고 끝까지 동영상을 봅니다.

6.  도구 --> 인터넷옵션 --> 설정 --> 파일보기를 클릭 합니다.

7.  임시인터넷폴더가 열리면 "크기"로 정렬합니다.
     맨위의 파일이 우리가 지금 막 본 동영상 파일 입니다.
     동영상 보기 직전 폴더를 비웠기 때문에 제일 큰 파일은 당연히 동영상 파일이 되겠죠...
     설마 이미지 파일이나 쿠키 파일이 동영상 파일보다 크진 않습니다.
 
     해당 파일의 주소는 파일 속성을 보시면 아래와 같습니다.
          20088.flv   확장자가 flv인 파일입니다.


8.  바탕화면으로 드래그 앤 드롭 해서 복사합니다.
      혹시 파일이 *.flv이 아니면 파일이름을 xxxxxxxxx.flv로 바꿔야 합니다.

9.  첨부한 Batch FlvConverter를 실행 시켜서 Added files--> Out Folder 지정.  Outoption을AVI로 설정

10.  PROCESS!를 클릭하면  CONVERTING 이 진행 됩니다.

11.  완료되면 AVI 파일이 생성 됩니다.

12.  컨버팅 완료된 AVI 파일을 블로그에 올리면 끝 ~

이 방법이면 대부분 다 되는 것 같습니다.



또다른 방법은  
동영상 사용자가 많아지자 이걸 빼낼수 있게 링크를 걸어주는 사이트가 생겼는데 바로
To Get Flv 입니다.
즉, 간단하게 링크를 걸어줘서 다운받게 하는데요, 바로 주소는

http://www.2getflv.com/2getflv/index.php


위 의 사이트에서 검색란에는  동영상주소(url)를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1. 보고 싶은 동영상에서
2. 퍼가기를 클릭하고  
3. [동영상링크주소] 복사하기를 클릭한 다음,
4.  위 사이트 검색란에 붙여넣기 를 한다음 검색하면...
5.  검색결과에 동영상미리보기가 보여지면 [다운로드]클릭 하면  끝.


전 개인적으로 두번째 방법을 선호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추천 꾹~~~  해 주는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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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동영상 다운로드, 컨버팅, 동영상올리기

유용한정보|2008. 2. 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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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엔캐스트(mncast) ucc, 다음tv팟, 네이버, 태그스토리, 판도라TV, 풀빵, 프리첼,
디오데오,UCCC 싸이월드 동영상아,아이플아우라, 엠군 등등
동영상을 다운로드하는 방법을 알아 봅시다.
 

일반적으로 주소를 찾아내서 다운로드하고 컨버팅하여 올리는것이 동영상 작업의 기본 입니다만
UCC 동영상의 경우 URL Snooper나 Net Transport, UCC다잡아 등 번거롭게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주소를 찾아내고 따로 다운받는 등의 작업이 필요없습니다.


절차 요약

1.  먼저 첨부한 컨버팅 프로그램 설치을 설치 합니다.

                                                        다운하여 zip파일을 새폴더에 풀어줍니다.


2.  다운받을 동영상이 있는 UCC 페이지로 갑니다.

3. 익스폴로러 --> 도구 --> 인터넷옵션 --> 쿠키삭제 --> 파일삭제 (오프라인항목도 삭제)

4.  동영상을 플레이 합니다.

5.  중간에 끊지 마시고 끝까지 동영상을 봅니다.

6.  도구 --> 인터넷옵션 --> 설정 --> 파일보기를 클릭 합니다.

7.  임시인터넷폴더가 열리면 "크기"로 정렬합니다.
     맨위의 파일이 우리가 지금 막 본 동영상 파일 입니다.
     동영상 보기 직전 폴더를 비웠기 때문에 제일 큰 파일은 당연히 동영상 파일이 되겠죠...
     설마 이미지 파일이나 쿠키 파일이 동영상 파일보다 크진 않습니다.
 
     해당 파일의 주소는 파일 속성을 보시면 아래와 같습니다.
          20088.flv   확장자가 flv인 파일입니다.


8.  바탕화면으로 드래그 앤 드롭 해서 복사합니다.
      혹시 파일이 *.flv이 아니면 파일이름을 xxxxxxxxx.flv로 바꿔야 합니다.

9.  첨부한 Batch FlvConverter를 실행 시켜서 Added files--> Out Folder 지정.  Outoption을AVI로 설정

10.  PROCESS!를 클릭하면  CONVERTING 이 진행 됩니다.

11.  완료되면 AVI 파일이 생성 됩니다.

12.  컨버팅 완료된 AVI 파일을 블로그에 올리면 끝 ~

이 방법이면 대부분 다 되는 것 같습니다.



또다른 방법은  
동영상 사용자가 많아지자 이걸 빼낼수 있게 링크를 걸어주는 사이트가 생겼는데 바로
To Get Flv 입니다.
즉, 간단하게 링크를 걸어줘서 다운받게 하는데요, 바로 주소는

http://www.2getflv.com/2getflv/index.php


위 의 사이트에서 검색란에는  동영상주소(url)를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1. 보고 싶은 동영상에서
2. 퍼가기를 클릭하고  
3. [동영상링크주소] 복사하기를 클릭한 다음,
4.  위 사이트 검색란에 붙여넣기 를 한다음 검색하면...
5.  검색결과에 동영상미리보기가 보여지면 [다운로드]클릭 하면  끝.


전 개인적으로 두번째 방법을 선호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아래 추천 꾹~~~  해 주는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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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정보|2008. 2. 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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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ge 겨 gyeo 격 gyeok 견 gyeon 결 g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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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gung 권 gwon 궐 gwol 귀 gwi 규 g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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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geul 금 geum 급 geup 긍 geung 기 gi
긴 gin 길 gil 김 gim 까 kka 깨 kkae
꼬 kko 꼭 kkok 꽃 kkot 꾀 kkoe 꾸 kku
꿈 kkum 끝 kkeut 끼 kki
나 na 낙 nak
난 nan 날 nal 남 nam 납 nap 낭 nang
내 nae 냉 naeng 너 neo 널 neol 네 ne
녀 nyeo 녁 nyeok 년 nyeon 념 nyeom 녕 nyeong
노 no 녹 nok 논 non 놀 nol 농 nong
뇌 noe 누 nu 눈 nun 눌 nul 느 neu
늑 neuk 늠 neum 능 neung 늬 nui 니 ni
닉 nik 닌 nin 닐 nil 님 nim
다 da
단 dan 달 dal 담 dam 답 dap 당 dang
대 dae 댁 daek 더 deo 덕 deok 도 do
독 dok 돈 don 돌 dol 동 dong 돼 dwae
되 doe 된 doen 두 du 둑 duk 둔 dun
뒤 dwi 드 deu 득 deuk 들 deul 등 deung
디 di 따 tta 땅 ttang 때 ttae 또 tto
뚜 ttu 뚝 ttuk 뜨 tteu 띠 tti
라 ra
락 rak 란 ran 람 ram 랑 rang 래 rae
랭 raeng 량 ryang 렁 reong 레 re 려 ryeo
력 ryeok 련 ryeon 렬 ryeol 렴 ryeom 렵 ryeop
령 ryeong 례 rye 로 ro 록 rok 론 ron
롱 rong 뢰 roe 료 ryo 룡 ryong 루 ru
류 ryu 륙 ryuk 륜 ryun 률 ryul 륭 ryung
르 reu 륵 reuk 른 reun 름 reum 릉 reung
리 ri 린 rin 림 rim 립 rip
마 ma
막 mak 만 man 말 mal 망 mang 매 mae
맥 maek 맨 maen 맹 maeng 머 meo 먹 meok
메 me 며 myeo 멱 myeok 면 myeon 멸 myeol
명 myeong 모 mo 목 mok 몰 mol 못 mot
몽 mong 뫼 moe 묘 myo 무 mu 묵 muk
문 mun 물 mul 므 meu 미 mi 민 min
밀 mil
  바 ba
박 bak 반 ban 발 bal
밥 bap 방 bang 배 bae 백 baek 뱀 baem
버 beo 번 beon 벌 beol 범 beom 법 beop
벼 byeo 벽 byeok 변 byeon 별 byeol 병 byeong
보 bo 복 bok 본 bon 봉 bong 부 bu
북 buk 분 bun 불 bul 붕 bung 비 bi
빈 bin 빌 bil 빔 bim 빙 bing 빠 ppa
빼 ppae 뻐 ppeo 뽀 ppo 뿌 ppu 쁘 ppeu
삐 ppi
  사 sa
삭 sak 산 san 살 sal
삼 sam 삽 sap 상 sang 샅 sat 새 sae
색 saek 생 saeng 서 seo 석 seok 선 seon
설 seol 섬 seom 섭 seop 성 seong 세 se
셔 syeo 소 so 속 sok 손 son 솔 sol
솟 sot 송 song 쇄 swae 쇠 soe 수 su
숙 suk 순 sun 술 sul 숨 sum 숭 sung
쉬 swi 스 seu 슬 seul 슴 seum 습 seup
승 seung 시 si 식 sik 신 sin 실 sil
심 sim 십 sip 싱 sing 싸 ssa 쌍 ssang
쌔 ssae 쏘 sso 쑥 ssuk 씨 ssi
아 a
악 ak 안 an 알 al 암 am 압 ap
앙 ang 앞 ap 애 ae 액 aek 앵 aeng
야 ya 약 yak 얀 yan 양 yang 어 eo
억 eok 언 eon 얼 eol 엄 eom 업 eop
에 e 여 yeo 역 yeok 연 yeon 열 yeol
염 yeom 엽 yeop 영 yeong 예 ye 오 o
옥 ok 온 on 올 ol 옴 om 옹 ong
와 wa 완 wan 왈 wal 왕 wang 왜 wae
외 oe 왼 oen 요 yo 욕 yok 용 yong
우 u 욱 uk 운 un 울 ul 움 um
웅 ung 워 wo 원 won 월 wol 위 wi
유 yu 육 yuk 윤 yun 율 yul 융 yung
윷 yut 으 eu 은 eun 을 eul 음 eum
읍 eup 응 eung 의 ui 이 i 익 ik
인 in 일 il 임 im 입 ip 잉 ing
  자 ja
작 jak 잔 jan 잠 jam 잡 jap
장 jang 재 jae 쟁 jaeng 저 jeo 적 jeok
전 jeon 절 jeol 점 jeom 접 jeop 정 jeong
제 je 조 jo 족 jok 존 jon 졸 jol
종 jong 좌 jwa 죄 joe 주 ju 죽 juk
준 jun 줄 jul 중 jung 쥐 jwi 즈 jeu
즉 jeuk 즐 jeul 즘 jeum 즙 jeup 증 jeung
지 ji 직 jik 진 jin 질 jil 짐 jim
집 jip 징 jing 짜 jja 째 jjae 쪼 jjo
찌 jji
  차 cha
착 chak 찬 chan 찰 chal
참 cham 창 chang 채 chae 책 chaek 처 cheo
척 cheok 천 cheon 철 cheol 첨 cheom 첩 cheop
청 cheong 체 che 초 cho 촉 chok 촌 chon
총 chong 최 choe 추 chu 축 chuk 춘 chun
출 chul 춤 chum 충 chung 측 cheuk 층 cheung
치 chi 칙 chik 친 chin 칠 chil 침 chim
칩 chip 칭 ching
칩 chip 칭 ching
코 ko 쾌 kwae 크 keu 큰 keun 키 ki
타 ta 탁 tak
탄 tan  
탈 tal 탐 tam 탑 tap 탕 tang 태 tae
택 taek 탱 taeng 터 teo 테 te 토 to
톤 ton 톨 tol 통 tong 퇴 toe 투 tu
퉁 tung 튀 twi 트 teu 특 teuk 틈 teum
티 ti
  파 pa
판 pan 팔 pal 패 pae
팽 paeng 퍼 peo 페 pe 펴 pyeo 편 pyeon
폄 pyeom 평 pyeong 폐 pye 포 po 폭 pok
표 pyo 푸 pu 품 pum 풍 pung 프 peu
피 pi 픽 pik 필 pil 핍 pip
하 ha
학 hak 한 han 할 hal 함 ham 합 hap
항 hang 해 hae 핵 haek 행 haeng 향 hyang
허 heo 헌 heon 험 heom 헤 he 혀 hyeo
혁 hyeok 현 hyeon 혈 hyeol 혐 hyeom 협 hyeop
형 hyeong 혜 hye 호 ho 혹 hok 혼 hon
홀 hol 홉 hop 홍 hong 화 hwa 확 hwak
환 hwan 활 hwal 황 hwang 홰 hwae 횃 hwaet
회 hoe 획 hoek 횡 hoeng 효 hyo 후 hu
훈 hun 훤 hwon 훼 hwe 휘 hwi 휴 hyu
휼 hyul 흉 hyung 흐 heu 흑 heuk 흔 heun
흘 heul 흠 heum 흡 heup 흥 heung 희 hui
흰 huin 히 hi 힘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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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정보|2008. 2. 22. 10:57
가 ga
각 gak 간 gan 갈 gal 감 gam
갑 gap 갓 gat 강 gang 개 gae 객 gaek
거 geo 건 geon 걸 geol 검 geom 겁 geop
게 ge 겨 gyeo 격 gyeok 견 gyeon 결 gyeol
겸 gyeom 겹 gyeop 경 gyeong 계 gye 고 go
곡 gok 곤 gon 골 gol 곳 got 공 gong
곶 got 과 gwa 곽 gwak 관 gwan 괄 gwal
광 gwang 괘 gwae 괴 goe 굉 goeng 교 gyo
구 gu 국 guk 군 gun 굴 gul 굿 gut
궁 gung 권 gwon 궐 gwol 귀 gwi 규 gyu
균 gyun 귤 gyul 그 geu 극 geuk 근 geun
글 geul 금 geum 급 geup 긍 geung 기 gi
긴 gin 길 gil 김 gim 까 kka 깨 kkae
꼬 kko 꼭 kkok 꽃 kkot 꾀 kkoe 꾸 kku
꿈 kkum 끝 kkeut 끼 kki
나 na 낙 nak
난 nan 날 nal 남 nam 납 nap 낭 nang
내 nae 냉 naeng 너 neo 널 neol 네 ne
녀 nyeo 녁 nyeok 년 nyeon 념 nyeom 녕 nyeong
노 no 녹 nok 논 non 놀 nol 농 nong
뇌 noe 누 nu 눈 nun 눌 nul 느 neu
늑 neuk 늠 neum 능 neung 늬 nui 니 ni
닉 nik 닌 nin 닐 nil 님 nim
다 da
단 dan 달 dal 담 dam 답 dap 당 dang
대 dae 댁 daek 더 deo 덕 deok 도 do
독 dok 돈 don 돌 dol 동 dong 돼 dwae
되 doe 된 doen 두 du 둑 duk 둔 dun
뒤 dwi 드 deu 득 deuk 들 deul 등 deung
디 di 따 tta 땅 ttang 때 ttae 또 tto
뚜 ttu 뚝 ttuk 뜨 tteu 띠 tti
라 ra
락 rak 란 ran 람 ram 랑 rang 래 rae
랭 raeng 량 ryang 렁 reong 레 re 려 ryeo
력 ryeok 련 ryeon 렬 ryeol 렴 ryeom 렵 ryeop
령 ryeong 례 rye 로 ro 록 rok 론 ron
롱 rong 뢰 roe 료 ryo 룡 ryong 루 ru
류 ryu 륙 ryuk 륜 ryun 률 ryul 륭 ryung
르 reu 륵 reuk 른 reun 름 reum 릉 reung
리 ri 린 rin 림 rim 립 rip
마 ma
막 mak 만 man 말 mal 망 mang 매 mae
맥 maek 맨 maen 맹 maeng 머 meo 먹 meok
메 me 며 myeo 멱 myeok 면 myeon 멸 myeol
명 myeong 모 mo 목 mok 몰 mol 못 mot
몽 mong 뫼 moe 묘 myo 무 mu 묵 muk
문 mun 물 mul 므 meu 미 mi 민 min
밀 mil
  바 ba
박 bak 반 ban 발 bal
밥 bap 방 bang 배 bae 백 baek 뱀 baem
버 beo 번 beon 벌 beol 범 beom 법 beop
벼 byeo 벽 byeok 변 byeon 별 byeol 병 byeong
보 bo 복 bok 본 bon 봉 bong 부 bu
북 buk 분 bun 불 bul 붕 bung 비 bi
빈 bin 빌 bil 빔 bim 빙 bing 빠 ppa
빼 ppae 뻐 ppeo 뽀 ppo 뿌 ppu 쁘 ppeu
삐 ppi
  사 sa
삭 sak 산 san 살 sal
삼 sam 삽 sap 상 sang 샅 sat 새 sae
색 saek 생 saeng 서 seo 석 seok 선 seon
설 seol 섬 seom 섭 seop 성 seong 세 se
셔 syeo 소 so 속 sok 손 son 솔 sol
솟 sot 송 song 쇄 swae 쇠 soe 수 su
숙 suk 순 sun 술 sul 숨 sum 숭 sung
쉬 swi 스 seu 슬 seul 슴 seum 습 seup
승 seung 시 si 식 sik 신 sin 실 sil
심 sim 십 sip 싱 sing 싸 ssa 쌍 ssang
쌔 ssae 쏘 sso 쑥 ssuk 씨 ssi
아 a
악 ak 안 an 알 al 암 am 압 ap
앙 ang 앞 ap 애 ae 액 aek 앵 aeng
야 ya 약 yak 얀 yan 양 yang 어 eo
억 eok 언 eon 얼 eol 엄 eom 업 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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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ung 워 wo 원 won 월 wol 위 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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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jong 좌 jwa 죄 joe 주 ju 죽 j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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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hyeong 혜 hye 호 ho 혹 hok 혼 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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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입 냄새가 나요. 어떡하죠?…증상별 민간요법

유용한정보|2008. 2. 19. 00:27
자꾸 입 냄새가 나요. 어떡하죠?…증상별 민간요법
충치도 없고, 양치질도 꼬박 챙기는데 민망한 입 냄새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 속 의 무언의 항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병에 따라 냄새의 유형과 문제 부위도 다르니 한번 체크해 보는 게 좋다.

혀에 백태, 노란빛을 띤다면

불필요한 소화액을 분비하는 등 과부하가 걸린 위가 약해지면서 생긴 입 냄새. 혀에 백태가 끼어 있거나 노란빛을 띤다. 불규칙한 식습관과 인스턴트식품 섭취로 인한 비정상적인 위 운동이 원인. 쉬지 않고 일하는 위는 끈적끈적해지고 열이 난다. 뜨거운 위장 안의 음식물은 부패하기 쉽고 그 탁한 기운이 입으로 올라와 악취를 만든다.

▶대나무잎차=시원한 기운을 담고 있는 대나무 잎을 10g씩 주전자에 넣고 달여 마신다. 식후 녹차를 마시거나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유자차를 마시는 것도 좋다.

▶기름진 음식, 육류, 차가운 음식, 야식, 폭식, 무리한 다이어트를 멀리하라. 이는 위를 자극해서 열을 발생시키는 습관이다. 주로 담백한 음식을 먹는 것이 좋고 밤늦게 식사를 할 경우는 산보 등으로 소화시킨 후에 잠자리에 들도록 하라.

찌릿한 소변 냄새, 비릿한 생선 냄새가 난다면

신장의 기능이 약한 경우로 몸의 수분을 조절하고 노폐물을 정화하는 신장에 문제가 생겨 침 속의 요소 농도가 높아져 소변의 지린내나 시궁창 냄새가 난다. 또 폐에 열이 찬 경우, 심장의 화기가 쌓여 이것이 폐를 누르게 된다. 즉 감정의 기복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입 냄새가 심해진다면 폐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회향 씨 달인 물=입 냄새 제거나 신부전증 치료에도 사용되는 ‘회향’의 씨. 신장과 방광을 따뜻하게 해 신장염이나 신부전증 치료에 도움을 준다. 단, 변비가 심한 사람은 삼갈 것.

▶익지인=감초 가루, 따뜻한 물과 함께 먹으면 폐의 열을 다스릴 수 있다.

▶폐는 감정 기복에 예민한 기관. 이곳의 열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스트레스를 컨트롤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란 썩는 냄새, 황백색의 설태가 낀다면

해독 기능을 담당하는 간이 제 기능을 못하면 몸 안의 독성 물질이 입으로도 배출된다. 술, 담배를 즐겨 하는 사람이 피로를 쉽게 느끼고, 뒷목이 뻣뻣하고 입 냄새까지 심하다면, 황백색의 설태가 끼는지와 간 기능도 함께 체크하자.

▶율무차=간의 열을 내리는 데 좋은 음식. 차로 마시거나 밥이나 죽으로 많이 섭취하는 것이 좋다. 칡 달인 물을 음료수처럼 마시는 것도 간을 다스리는 한 방법.

구기자 차=간의 해독을 도와 숙취를 풀어준다. 간의 열을 내려 안정시켜주고 고혈압 예방 효과도 있다.

▶오미자차=쉽게 피로를 느끼거나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간 기능을 강장제처럼 보조해준다.

코에 악취, 코와 입으로 올라온다면

인후염은 편도선에 염증이 있을 때 세균 덩어리와 음식물 찌꺼기가 뭉쳐서 노란 알갱이 같은 결석이 생긴 것. 편도선에 결석이 생기면 코와 입을 통해 날숨을 쉴 때 냄새가 함께 묻어 올라온다. 대표적 입 냄새 유발 원인으로 코 질환을 들 수 있는데 편도선염이나 비염, 혀의 염증, 심지어 축농증까지 입 냄새를 유발할 수 있다.

▶비염, 축농증 등 코 질환은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아세톤 냄새나 과일 향 냄새, 입안이 건조해지면

당뇨병이 있을 때는 내분비 장애로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는다. 자연히 탄수화물 소화 능력이 떨어지고 대신 지방 대사가 활발해진다. 이때 아세톤 냄새가 나는 성분이 폐를 통해 입과 코로 나오게 된다.

▶배즙차=인슐린이 부족해지면 혈액 내에 당 성분이 쌓이게 되는데 입 안이 말라 수분을 자주 찾게 된다. 입 안이 건조해지면 입 냄새가 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때는 배를 강판에 갈아 즙을 낸 후 꿀을 넣어 차처럼 마시는 것이 좋다.

▶당뇨는 침 속의 당 농도가 높아 치주 질환을 일으키기 쉽다. 입 속의 세균 등 또 다른 부분이 원인이 되어 입 냄새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혀와 입 안 벽까지 꼼꼼하게 칫솔질하고 채소의 섬유질을 이용해 치아에 붙은 찌꺼기를 제거하는 것이 더 심한 입 냄새를 막을 수 있다.

153한의원(02-557-1175 www.153hanbang.com)의 한형희 원장은 “한방치료는 먼저 면역 정도를 정상화 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질병의 원인인 면역체계를 바로잡아 장 기능과 몸 기능을 동시에 강화시켜 근본적인 치료는 물론, 재발 또는 기타 유사발병인자의 예방 등 총체적 치료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원장은 “입 냄새는 심장에 열이 있거나, 방광의 열이 소장을 뜨겁게 달궈 염증이 생기는 것으로 열을 없애주고 오장의 뭉친 기운을 고르게 하면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안신길 세계닷컴 기자 ejournal@segye.com

<■도움말=한형희 153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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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모으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 Best 6

유용한정보|2008. 2. 16. 07:26
돈 모으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 Best 6..
 

『재테크』는 『기술』이 아닌 『습관』

마음껏 지출하면서 동시에 저축도 많이 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꿈이다.
하지만 수입은 한정되어 있고 지출은 고정적이다.
결국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덜 쓰는 방법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이 재테크를 위해 꼭 챙겨야 할 기본적인 습관에 대하여..

서민들에게 1억원은 몇 년을 안 쓰고 모아도 만들기 어려운 금액이다.
그런데 요즘 1억원을 은행에 저축하면 한달에 대략 27만원의 이자소득을 기대할 수 있다.
 
은퇴한 노부부가 독립해서 살아가려면,
한달 생활비만 200만원 가까이 소요되는 것이 현실이고,
안정된 직장에서 정년퇴직해도 은퇴 후 20년은 소득 없이 지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젊은 부부들은 벌써부터 앞이 캄캄하다.
 
만일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효과적인 소비뿐이다.



 

1. 무슨 일이 있어도 소득의 40%는 저축한다.
    재테크의 기본은 절약이다.
 
100원씩 9번 안 쓰는 것보다 1,000원 1번 절약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무조건 소비를 줄이고 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 절약과 저축을 하지 않고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돈은 처음 모으기는 힘들지만,
어느 정도 기반이 마련되고 투자가 진행되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종자돈은 이러한 시스템의 기초다.
종자돈을 효과적으로 마련하기 위해 소득의 40% 이상은 우선적으로 저축하고,
남는 한도 내에서 소비를 한다.
도시가계 평균 저축률이 30%라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무리한 비율이라고 보기 힘들다.
특히 자녀가 없거나 아직 어리다면 저축의 비율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2.   30 대에는 연금형 상품으로 노후자금을 모아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노후자금은 지금 이 순간부터 은퇴 시기까지의 기간 동안 마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시작할수록 부담을 줄일 수 있는 것.
특히 최근에는 퇴직금 제도가 폐지돼 은퇴시 별도의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고,
은퇴 시기도 과거보다 빨라지고 있다.
통계상 평균 은퇴 시기는 53세지만,
40대부터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늦어도 30대 중반부터는 직접적으로 노후자금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급여생활자의 경우는 연금형 상품을 이용하면
세제혜택을 통해 불입한 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도 받을 수 있다.


3.  부부 보장성 보험에 가입해 예상외의 지출에 대비한다.
 
만일 불의의 사고나 질병이 닥치게 되면 당장 치료비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고,
입원 등으로 인해 경제력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테크에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다.
 
살림살이가 빠듯하더라도 최소한 6∼8% 정도는 위험관리비용으로 책정하고,
위험보장 및 연금지급 기능이 있는 종신보험이나 보장성 보험 등에 가입해두는 것이 현명하다.
건강에 별다른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30~40대 시절에는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정작 변수가 닥치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4.  서민 금융기관에도 눈을 돌려라.
 
재테크에 강한 사람들은 신용협동조합이나 상호저축은행(前 상호신용금고) 혹은 새마을금고 등
이른바 서민금융기관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이 금융기관들은 은행의 정기예금에 비해 1년 기준으로 약 0.5~1.5% 정도 이자를 더 받을 수 있다.
 
신협이나 새마을금고에서는 예탁금이라는 상품이 판매되는데,
1인당 2,000만원까지 이자소득세가 면제된다.
농특세를 내야 하기는 하지만 이자소득세 면제만으로도 금리가 약 1% 가까이 상승한다.
게다가 비과세이므로 과세대상에서도 제외된다.
예탁금은 1개월 이상만 가입해도 세금혜택을 받을 수 있어서 단기로 자금을 운용하는 데 적당하다.


5.  목돈 마련을 원한다면 적립식 펀드를 노려라.
 
자녀의 교육자금을 마련해야 하거나 내 집 마련 자금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하다.
목돈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안정적이면서도 실효수익이 높은 세금우대 적금이나 적립식 펀드가 좋다.
금융권의 세금우대 적금은 안정적이면서 확정금리를 지급해주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적용금리가 매우 낮다는 단점이 있다.
 
보다 높은 수익률로 목돈 마련 시기를 줄이기 원한다면,
적립식 펀드를 이용한 목돈 마련 방법을 고려해볼 수 있다.


6.  소비를 줄이기 힘들다면 체크카드를 사용해라.
 
무분별한 카드 사용으로 과도한 지출을 하고 있다면 체크카드를 사용해 소비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
평소에 체크카드의 잔고 규모를 정해놓으면 그 이상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충동구매나 과소비를 미리 방지할 수 있다.
 
신용카드 가맹점에서도 사용이 가능해 편리하고,
현금카드 기능도 있어 적당한 한도 내에서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사용한 금액의 20%에 대해서 소득공제가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다.
또 신용카드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 내용을 일괄적으로 확인할 수도 있어
규모 있는 지출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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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샾 88가지 기법

유용한정보|2008. 2. 16. 06:47
포토샵 88가지 기법
 
      (간단한 작업으로 사진 보정하기)
     (블러(Blur)효과를 이용한 파일 사이즈 줄이기)
32.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27
      (포토샵을 이용한 간단한수평과 수직 맞추기)
33.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28
     (칼라 이미지를 흑백으로 변경하는 다양한 방법)
34.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29 (네 쌍둥이 만들기)
35.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0
     (이미지의 특정한 어두운 부분을 밝게 복원 시키기 방법)
     (도장툴을 이용한 이미지 복사1)
37.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2
      (포토샵을 이용한 쉬운 번개효과)
40.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5 (또렷한 사진 만들기)
     (불필요한 이미지 영역 제거하기)
42.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7
      (이미지의 특정 부분 선명하게 하는 방법)
43.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8.
      (포토샵 툴상자의 사용 용도)
44.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39.
      (Shear 필터를 이용하여 로고 넣기)
45.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40.
      (영어로 된 폰트 이름 한글로 변경하는 방법)
      (포토샵에서 이미지 손쉽게 정렬하기)
47.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42.
      (포토샵에서의 다양한 문자 효과(Warp text))
48.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43.
     (포토샵 5.5와 비교해서6.0에 추가된 기능에 대해 알아보자.-[1])
57.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2.
     (포토샵 5.5와 비교해서6.0에 추가된 기능에 대해 알아보자.-[2])
58.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3.
      (포토샵 7.0에 추가된 기능)
59.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4.
      (커브(Curves)로 다양한 느낌 표현해보기)
60.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5.
     (내가 찍은 사진으로 윈앰프(winamp) 스킨 만들기)
     (Layer Style 기능에 대해 알아보자.)
62.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7.
      (포토샵을 이용한 텍스트 효과)
63.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8.
      (레이어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보자 (1))
64.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59.
      (레이어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보자 (2))
65.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60.
      (레이어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보자 (3))
     (레이어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보자 (4))
67.
초보를 위한 포토샵 강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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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100대 과학 사건

유용한정보|2008. 2. 16. 06:40

1. 불의 이용
초기 인류가 이룩한 가장 큰 기술적 변혁으로는 불의 발견과 그것의 광범위한 사용을 들 수 있다. 인류가 초기에 달성한 기술적 성과 중에 직조와 재봉 등은 이미 몇몇 동물들에 의해 선행되고 있었지만 불은 어떠한 동물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또한,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킨 것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기술의 위력을 경험한 최초의 사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불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전기를 제2의 불이라 하고 원자력을 제3의 불로 칭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의 사용으로 인류의 생활과 기술은 급격히 향상될 수 있었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화로를 중심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원시 공동사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불을 통해 음식물을 익혀 먹음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다양한 음식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고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을 줄임으로써 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음식물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가공법을 익히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과학 기술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음식물을 끓이기 위해 점토 용기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경험으로부터 고온 처리 기술이 습득되었고 이것은 이후에 야금 기술과 연결되어 금속 시대를 여는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공구가 물리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불은 화학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2. 바퀴의 발명
바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힌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바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 경으로서, 탈것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도공(陶工)들이 사용하는 물레에 사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유사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바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퀴는 빠른 속도로 북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처음에 바퀴달린 탈것은 의식(儀式)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고, 곧 전쟁에 이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이 물건을 나르는 데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최초의 바퀴는 통나무를 원반 모양으로 잘라내어 다듬은 형태이거나 세 개의 널빤지를 서로 결합시켜 원형으로 깎은 형태였다. 이러한 바퀴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서졌으므로, 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얇은 나무나 구리로 만든 테를 둘러 사용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바퀴살이 달린 바퀴가 처음으로 나타나 이용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바퀴의 사용이 불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곧 문명의 발전을 의미한다는 식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운송 수단으로 바퀴를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 문명권들도 존재했다. 바퀴의 사용은 인류 문명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였다기보다는 특정한 문명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수한 요소였던 셈이다.
 

3. 그리스 자연 철학의 시작
일반적으로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진다. 자연 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고, 자연을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전통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학문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철학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자연 철학'이라고 불린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도시 국가라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 아래에서 토론하는 전통이 싹틀 수 있었고, 해상 무역 활동의 혜택으로 비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색한 내용은 상당히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 세상을 만든 근본 물질은 무엇인가?', 또 '그 근본 물질에서 어떻게 다양한 물체와 현상들이 생겨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탈레스는 물을, 아난시만드로스는 무한자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 물질로 제시하였다.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어떤 물질이 다른 어떤 물질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엠페도클레스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물질이 근본물질이며, 네 가지 근본 물질은 변하지 않고 이것들이 섞여서 여러 가지 다른 물체가 된다고 주장하였고, 데모크리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원자들이 모여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더 나은 주장을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학문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그리스 자연 철학의 진정한 과학적 의의는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4. 피타고라스 정리의 발견
고대 그리스 수학의 발전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정리를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삼각형이 세 변의 길이의 비가 3 : 4 : 5나 12 : 13 : 5이면 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각 삼각형의 정리'를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 정리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사상 최초의 '증명'이었다. 즉, 피타고라스는 논리적 증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기술에 가까웠던 산술이나 측량술을 수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고, 그래서 그를 '수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오늘날의 수학자들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강한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은 종교적 믿음과 섞여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문은 종교와 수학이 뒤섞여 있는 것이었지만, 자연의 만물에는 자연수로 나타낼 수 있는 조화 또는 비율이 있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남겼다. 이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제일 큰 공헌이었다.
 

5. 금속의 발견
인류가 획득한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도 금속의 사용은 재료의 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금속은 석기에 비해 가공성이 뛰어나고 외부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금속 중에서도 인류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청동과 철이다. 이것은 인류 시대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철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이후에 플라스틱이나 세라믹과 같은 신소재가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통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금속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속을 생산하려면 독립적인 전문가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에는 장인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동은 희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에 청동의 용도와 사용자는 매우 국한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철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에 매우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이나 장인을 넘어 평범한 농부도 금속으로 된 도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기 시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6. 고대 원자론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본적 원소의 존재 여부에 대한 토론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주창했던 고대의 원자론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온 세계는 아주 작은, 무한히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원자들은 진공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 또한 이 원자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러 크기, 모양으로 무한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물질은 구성 원자들이 배열된 모양과 구조,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들이 주장한 원자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를 무수히 나눈 것이기 때문에 원자론은 존재론적으로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한히 많은 원자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고대 원자론자들은 비결정론적이고 무신론적인 견해를 표방했다.

고대 원자론은 본질적으로 정량적, 실험적 연구나 수학적인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사색과 직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이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적론적인 입장과 신을 배제하고, 우연을 인정치 않으며, 모든 운동을 필연적인 상태로 보는 기계적인 세계관을 채용한 것은 근대 물리학의 방향과 일치한다.
 

7.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고대인의 의학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 '죄에 대한 벌'로 질병을 보는 도덕적 질병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약 460∼375년경)는 질병을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 코스 섬 출신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의 주장과 그를 따른 학자들의 주장은 이른바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남아 있으며 이 전집은 오랫동안 의학의 최고 경전으로 칭송받았다. 오늘날에도 의료 행위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숭고한 직업정신이 본보기로 통하고 있어 의사의 길을 가는 이들은 꼭 한번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게 된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질병을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사체액 사이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사체액을 각각 사계절과, 공기, 물, 불, 흙 사원소와 습하고 건조하며 뜨겁고 찬 네 가지 성질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당시 의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료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풍토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였다.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사체액을 자연의 원소와 성질에 연결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의 의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능수능란한 언변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질병을 신들과 연결시켜 대중의 무지와 두려움을 이용하였다. 지금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그러한 의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신분을 초월하여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과 경험적이고 체계적인 의학 연구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8.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문학 이론부터 역사, 정치학, 논리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수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더욱이 그는 이 분야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의 각 분야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그의 우주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우주를 중심에 있는 지구부터 달까지의 지상계와, 달부터 그 위까지의 천상계로 나누었다. 항상 변화하는 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여서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 운동만 있는 반면, 영구 불변의 완전한 세계인 천상계에는 오직 등속 원운동만이 있다. 한편 천상계에는 완전한 원소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구들이 있지만, 지상계에는 차가움/따뜻함, 건조함/습함의 4가지 성질이 조합된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가 지구의 중심부터 무거운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천상계의 등속 원운동과 지상계의 수직운동을 '자연적 운동'으로, 외부로부터 운동 원인이 작용할 때만 발생하는 운동을 '비자연적 운동'으로 구분하였다. 즉 그의 우주론은 물질 이론임과 동시에 운동 이론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대단히 거대하고 잘 짜여진 체계였다. 이렇게 거대한 체계의 일부를 부정하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다른 이론들까지 문제삼아야 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체계였다는 점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이후 약 2천 년 동안이나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수학책은 단연 유클리드(Euclid, B.C. 259년경 활동)의 <기하학원론>이다. 유클리드가 지은 <기하학 원론>은 천 년 이상 기하학의 고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는 수학으로 그와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법을 사용하지만 정작 뉴턴 자신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열세 권으로 이루어진 <기하학 원론>은 이전의 여러 사람들, 특히 피타고라스와 에우독소스의 정리를 설명하여 편찬한 고대 기하학의 종합판이다. 기하학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는 왕의 질문에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클리드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가 헬레니즘 시대를 살았고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 이외에 몇 가지 다른 저술을 남겼다. <자료론>과 <분할에 관하여>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기하학의 오류를 담은 <오류론>, 아폴로니우스가 내용을 덧붙인 <원추곡선론> 등은 후세의 주석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기하학 원론>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단순히 도형들에서 발견되는 여러 법칙을 서술한 것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공준과 공리에서 정(리)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증명하기까지 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이후 수학적 논증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10. 종이의 발견
종이는 흔히 나침반, 화약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발명품이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종이는 서기 105년에 후한(後漢) 대의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250년 이상 일찍 발명되어 기원전 14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종이는 처음에는 뭔가를 기록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포장 재료나 의복, 개인 위생용으로 이용되었다. 기록 용도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한 증거는 서기 110년경이 되어야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동을 거쳐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제지술은 751년 경 중앙아시아의 슈마르칸트에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카이로, 모로코, 스페인을 차례로 거쳐 서유럽에 퍼졌으며, 14세기에는 서유럽 각지에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중세 서유럽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는 이후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종이는 15세기 이후 발전한 인쇄술과 함께 지식의 대중화 과정을 주도하여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1. 프톨레마이오스 알마게스트
알렉산드리아 토박이였던 고대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뮤제온에서 천문학, 점성술, 광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알마게스트>라는 천문학 책인데, 이는 '가장 위대한 것'이란 뜻으로 훗날에 아랍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가 너무나 훌륭하다고 해서 원제목 대신 붙인 이름이다. <알마게스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에 바탕을 두고 행성의 움직임을 원운동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전원', '이심원' 등과 같은 복잡한 수학적 도구들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도구들은 행성들이 실제로는 타원 궤도를 따라 운행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자들이 행성의 움직임을 규칙적인 원운동으로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것들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다고 간단히 말하기 쉽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지동설과 타원궤도를 몰랐던 헬레니즘 천문학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여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알마게스트>는 원운동을 이용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매우 훌륭한 책이었다. 실제로도 이 책에 따라 행성의 운동을 계산한 결과는 매우 정확하였고, 이 때문에 그 후 1,500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최고의 천문학자로 존경받았다.
 

12. 나침반의 발명
역사상 중국인에 의해 발명된 최고의 발명품으로 나침반, 종이 그리고 화약이 손꼽힌다. 이들 세 발명품은 거의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나침반은 지자기에 의해 자침이 항상 자기북쪽을 향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항해, 여행 등 먼거리를 이동할 때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도구이다.

자석이 지구의 북쪽을 향하는 성질은 유럽보다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자석의 성질을 기술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후한(25∼220)시대 왕충(王充)의 저서 <논형(論衡)>에 의하면 '자석인침(慈石引針)' 외에 '사남(司南)의 국자(杓)'라는 기록이 있다. 천연 자석을 국자 모양으로 만든 것을 '사남의 국자'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테이블 위에 두면 그 머리가 남쪽을 향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자석은 '마그네시아의 돌'이라는 뜻의 '마그네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그것이 나침반으로서 사용되게 된 것은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자석은 특히 14세기 이후 서양의 함선들이 전 지구를 항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이후 자석이 없는 항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GPS, 즉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여전히 나침반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0. 0의 발견
그리스의 수학이 엄격한 논리적 사고를 북돋우는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수학은 일찍부터 수의 추상화에 성공하여 복잡한 산술이나 대수를 발달시키고 있었다. 고대에는 인도인들도 그리스나 로마인, 또는 그에 앞선 고대의 이집트 사람들처럼 10진법을 쓰면서도 10, 100, 1000, 10000....등에 각각 다른 부호를 써야 하는 불편한 기수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이들은 같은 부호를 자리에 따라 다른 값으로 읽을 줄 아는 지혜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0'을 오늘날의 우리처럼 쓸 줄 알게 되었다.

자리에 따라 같은 부호로 다른 숫자를 나타내게 하는 방법은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쓰여졌지만, '0'을 알게 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도 0을 발견하고 썼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은 대서양 저쪽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아시아나 유럽의 구 문명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구대륙에 0의 사용이 퍼진 것은 인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도에서 0을 써서 남긴 기록은 적어도 5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실제로 0이 알려진 것은 그보다 수백 년도 더 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4. 금속활자의 등장
우리 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책을 인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금속활자가 처음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고려 시대 고종 21년(1234) 경이었다. 당시의 학자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후집에서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금상정예문>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아 어떤 모양의 책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는 역시 고려 시대인 우왕 3년(1377)에 인쇄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직지심경>이 꼽히는데, 이는 흔히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요한 구텐베르크보다 70년 가량 앞서는 기록이다.

그러나 활자 인쇄술이 사회적으로 더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정작 서양에서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지식층의 숫자가 적어 책의 수요도 많지 않았으므로, 활자 인쇄술이 지닌 잠재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반면 서양의 알파벳은 활자 인쇄술의 보급에 적절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1450년 평평하게 배열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여 수백 권의 책을 인쇄한 구텐베르크가 이러한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15. 콜럼부스의 항해
황금의 나라 인도를 향한 스페인 왕실 소유의 탐사대는 드디어 1492년 10월 12일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사는 한 해변에 도착하였다. 탐사대의 대장인 콜럼버스(Columbus, 1451∼1506)는 이 땅을 '구원의 성자'란 이름의 '산 살바도르'라고 불렀다. 신대륙에 유럽인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찍힌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진짜 인도 대륙이라고 믿었다. 1497년 브라질을 탐험한 아메리고 베스풋치의 항해기로 신대륙이 널리 알려진 뒤 그 이름은 비로소 아메리카가 되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 후반부터 아버지를 도와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항해를 하였다.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이후로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83년 이 꿈을 포르투갈 왕에게 청원하였으나 거부되었으며, 몇 년 뒤 마침내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원조를 얻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세 척의 배는 인도로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어진 네 번의 항해도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에게 약속한 엄청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항해 내내 반란과 문책에 시달렸지만, 황금만큼 전세계 시장을 휩쓴 담배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16. 삼차방정식의 일반 해법 발견
일찍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x3 + x2 = c 라는 형태의 3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3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도 3차 방정식을 풀겠다는 노력은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최초로 3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한 것은 16세기 초 무렵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로(S. del Ferro)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해법을 공표하지 않고 사위인 피올레에게만 전수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전수받은 피올레는 해법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누구에게나 자랑했다고 한다. 그 소문에 자극을 받은 베니스대학의 교수 타르탈리아(N. Tartaglia)는 3차 방정식에 몰두하여 마침내 그 해법을 혼자 알아냈다. 1535년 피올레와 타르탈리아는 공개석상에서 서로 문제를 풀어 승패를 겨루게 되었는데, 타르탈리아가 피올레의 문제를 2시간 남짓 걸려 풀었는데 반해 피올레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타르탈리아의 승리가 널리 세상에 알려지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해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중 밀라노 대학의 카르다노(G. Cardano)는 타르탈리아가 언어장애자란 약점을 이용해 자기가 저서를 발표할 때까지는 절대로 남에게 공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법을 전수받았다. 몇 해 후인 1541년, 카르다노는 타르탈리아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고등대수학>을 출판하여 3차 방정식의 해법을 공표했다. 이 결과 불쌍하게도 3차 방정식의 해법은 카르다노의 방법이라 하여 인용하게 되었다.
 

17.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 등장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 유학할 때 마침 붐을 이룬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단순하며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인 그의 눈에 비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허점 투성이로 보였다. 그는 천동설에 반대해서 자신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1543년에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한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지구가 돌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모든 떨어지는 물체에 앞서 갈 것이며, 지구 위의 동물과 물체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대기권 안의 모든 것은 지구와 함께 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구와 같은 큰 땅덩어리가 돈다면 원심력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더 빨리 도는 천체들은 무사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같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운동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다 있음직한 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은 천문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중세의 우주관과 그것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밑둥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가장 존엄한 존재였는데, 이제 인간은 여러 행성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작은 별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가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했으며,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체제는 차츰 깨어지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었으니, 코페르니쿠스야말로 이 변화의 첫 신호를 울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18. 베살리우스의 새로운 해부학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하여 천문학의 혁명을 시작하던 시기에 해부학에서도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가 주도한 새로운 흐름이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파리와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서 공부한 뒤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 뒤 당시의 관례인 대리 해부를 거부하고 직접 인체 해부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1543년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란 7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 실린 해부도는 너무나 생생하여 한동안 능가하는 책이 없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도는 사실적인 해부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새로운 연구 방법은 이후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들에게 이어져 해부학을 순수한 경험과학으로 정착시켰다.

16세기까지 널리 받아들여지던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은 소화, 호흡, 신경 활동을 각각 자연, 생명, 동물의 영혼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해부학은 이러한 갈레노스의 이론을 검증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 결과 갈레노스가 말한 허파 좌우심실 사이의 격막 구멍이 없으며 정맥보다 동맥에 더 많은 피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베살리우스는 이러한 발견들은 세밀한 해부도와 교육을 통해 전 유럽으로 전파하였으며, 그 결과 새로운 해부학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이때 인체의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학 지식이 축적되었으며, 오늘날 사용하는 용어들이 거의 대부분 정립되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부터는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에서 기능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17세기 하아비가 피의 순환 이론을 바탕으로 생리학의 혁명을 가져왔다.
 

19. 그레고리오력의 반포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기존의 달력체계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달력체계를 선포하였다.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은 1태양년을 365.25일로 하고, 4년 마다 하루씩 '윤일'을 넣어 달력과 계절이 일치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측정할 때 생기는 약간의 오차로 인해 100년마다 하루씩 늦어지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밀린 날짜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14일에 달하자, 교황은 당시 3월 11일이었던 춘분을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시대의 춘분 날짜인 3월 21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1582년 10월 4일을 기점으로 달력의 날짜가 열흘씩 앞당겨져 10월 4일 다음날은 10월 15일이 되었다.

그레고리력이 율리우스력과 다른 점은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 중에서도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가 아니면 윤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로 1600년, 2,000년은 윤년이다. 또한 4,000년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 아니고 평년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어 2만년에 하루 정도 오차가 생길 만큼 정확하다. 개정된 지 1년 만에 그레고리력은 이탈리아의 소국가,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카톨릭을 믿는 독일의 소국가에 전파되었으며, 점차 다른 국가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699년에는 신교를 믿는 독일의 소국가들, 1752년에는 영국과 그 식민지, 1753년에는 스웨덴, 1873년에는 일본, 1912년에는 중국, 1918년에는 소련, 그리고 1923년에는 그리스가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20. 현미경의 발견
너무 작거나 멀리 있어서 맨 눈으로 분석할 수 없는 물체를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사용하여 확대해서 본다는 착상은 과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작은 물체를 확대하는 기능을 가진 현미경은 1590년에 네델란드의 젠센에 의해 최초로 발명되었고, 현미경의 초점 조절 장치는 1668년 이탈리아의 캄피니가 개발하였다. 1660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뢰벤후크는 최초로 현미경을 사용하여 박테리아를 관찰하였는데, 그가 만든 270배율의 현미경은 미생물과 인간의 혈구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현대의 광학 현미경은 배율이 수 천 배에 이르는데, 이 정도의 배율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렌즈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효율적인 광학 현미경의 설계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전자 현미경이다. 전자 현미경은 100만 분의 1밀리미터 정도의 물체를 전자의 파동성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장치이다. 전자 현미경에는 주사 전자 현미경과 투과 전자 현미경이 있다. 전자 현미경은 생물학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으며, 암석의 연구, 재료 과학, 반도체 제조 등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전자 현미경은 1926년 한스 부쉬가 설계했다. 부쉬의 발명은 1873년 에른스트 아베의 이론적 업적과, 이를 이은 베를린 공대의 에른스트 루스카와 막스 크놀의 노력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은 1933년에 전자 현미경을 최초로 실용화시켰다.
 

21. 길버트, <자석에 대하여>
16세기 말 런던의 유명한 의사이며 후에 궁정의가 되기도 했던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가 1600년에 출판한 책 <자석에 대하여>는 근대 자기학과 전기학을 태동시킨 저작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석에 대하여>는 자기 현상에 관한 기본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놓은 체계적인 논의였고, 이 주제에 관한 이처럼 방대한 저술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물론 이 책에 담긴 자료들 중에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사실을 가려내서 실었고, 또 실험을 통해 수집하고 확인한 사실들을 싣는 등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논의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당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던 르네상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책이기도 했다. 길버트에게 자기 현상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들로 가득찬 우주의 가장 중요한 활동적 원리였으며, 그런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열쇠였다. 한편 이 책은 전기 현상에 관한 상당량의 탐구 결과를 담고 있는 최초의 책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길버트는 그동안 흔히 혼동되어 오던 자기 현상과 정전기 현상을 분명히 구분했고, 정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몇몇 도체들에 관해 기술하기도 했다.
 

22. 천체망원경 제작
1609년 갈릴레이는 먼 데 있는 물체를 확대하여 보는 '망원경'이라는 것이 네델란드의 미델부르크의 안경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스 리퍼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해에 '망원경'의 발명특허권을 얻었다. 갈릴레이는 렌즈를 여러 가지로 조합하여 광학적 성질을 연구하고 손수 몇갠가의 개량된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것으로 하늘을 살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다. 그는 망원경 관찰을 통해 천체가 전통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구보다 완전하거나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태양 표면에는 반점들이 있고, 높은 산이 있는 달은 지구와 비슷했다. 그는 달 속의 산 그림자의 길이로 그 높이를 추산했다. 그리고 달이 초생달에서 만월로 모양이 바뀌듯이 금성도 그 모양이 변하고 있다는 것과 목성에는 네 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따르는 태양계를 소규모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16세기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행성의 위치에 관해 톨레미 체계보다도 정확한 예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전통적 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이 점차 진보하면서 코페르니쿠스 학설도 점점 힘을 얻게 되었고, 갈릴레이의 여러 발견이 그 타당성을 증명해주었다.
 

23. 케플러의 1,2 법칙 발견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 혁명은 케플러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일했던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은 후 스승의 정밀한 관측 자료를 몽땅 물려받았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몇 개의 원운동만으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애써 봐도 8분의 오차를 없앨 수가 없었다. 이 8분의 오차를 없애기 위해 케플러는 '천체는 원운동한다'는 그때까지의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원운동이 가장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운동으로서 천상계의 천체는 원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케플러는 이 신념을 포기하고 타원궤도를 새로이 도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행성은 이제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도는 것으로 제시되었다(케플러의 제1법칙). 또한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도는 속도도 균일한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멀때는 천천히, 가까울 때에는 빨리 도는 것으로 설정하였다(케플러의 제2법칙). 그럼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전원과 같은 복잡한 기하학적 모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행성의 궤도는 부등속 타원 운동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모델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케플러의 업적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부등속 타원 운동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이 문제에 대해 태양에서 방출되는 자기적 힘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뉴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24. 하비의 혈액순환이론
고대이래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의 시의이자 의학자였던 갈레노스의 인체구조 및 작용에 관한 이론이 정설로 통용되어왔다. 갈레노스는 인체의 세 가지 중요기능--소화, 호흡, 신경--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여기에는 사람이 섭취한 음식물은 위와 장을 거쳐 간에 이르러 '자연의 영(natural spirit)', 즉 피로 바뀌어서 정맥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고 영양분으로 소모된다는 설명이 소화에 대한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발하게 행해진 인체 해부를 통해 갈레노스가 주장한 해부학적 지식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의학자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갈레노스 이론을 부정하고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하비는 맥박이 뛸 때마다 방출되는 피의 양과 맥박의 횟수로부터 적어도 하루에 300Kg 이상의 피가 방출된다고 계산해 내고, 사람의 체중의 몇 배가 되는 이 많은 양의 피가 매일 생성되고 소모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실험적인 증거를 통해 그는 피가 심장에서 나와 동맥을 지나 온몸을 돌고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록 하비는 갈레노스처럼 인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체계를 세우지 못했지만, 혈액 순환이론이 등장하면서 인체에 대한 생리학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5.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과학 철학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교육제도의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가 지은 저술 가운데 <학문의 진보>와 <과학의 신기관(Novum organum)>에는 17세기 초의 유럽 학문을 혁신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신감에 충만한 그의 기독교적 학문 혁신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있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자연 외적인, 즉 인간의 목적이나 관심이 과학에 들어오자 인간위주가 된 과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중세로 접어들어 여기에 종교까지 섞여 들어서 과학적 지식과 경쟁을 하게, 과학은 베이컨 자신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타락해 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근대과학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베이컨의 학문 혁신론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학문 혁신론이 탄생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그는 거의 깨닫지를 못했었다. 베이컨 이후 17세기 전체에 걸쳐 과학 사상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업적에 지배되고 있다고 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그의 체계적 의심의 방법(method of systemaitc doubt)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한 가지 한 가지씩 부정해 나갔다. 그는 우선 감각에 의한 인간의 경험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의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부정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외부의 존재도 의심하고 부정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의 존재와 그 완전성을 증명했고, 그에 바탕해서 다시 외부세계의 존재 및 여러 현상들에 관한 지식을 증명해 나가고 결국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에 대한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러한 지식체계에 바탕을 둔 것이 바로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이다. 이같은 데카르트의 지식체계는 아주 널리 받아졌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26. 갈릴레이, <두 개의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출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33년에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 즉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금지령을 내린 상황에서 갈릴레이가 <두개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하고 지동설을 옹호함으로써 금지령을 어긴 것이 죄목이었다.

이 책은 3명의 가상 인물이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체계, 즉 천동설에 관해 나누는 대화 형식이었다. 갈릴레이는 드러내놓고 지동설이 옳다고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하는 새로운 역학 개념과 망원경을 통해 관측한 결과들, 예를 들어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 변화 등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지동설로 기울어지도록 유도했다. 특히 이 책은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 천문학자가 아닌 수많은 지식인들의 우주관에 영향을 주었다. 만일 지동설이 옳다면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므로 인간의 지위,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 운동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역학, 움직이고 있는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운동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와 달리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모색한 최초의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27. 수은온도계의 등장
온도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덥거나 춥다고 느끼는 감각을 결정한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접촉했을 때 고온의 물체는 시원하다고 느끼고, 저온의 물체는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두 물체가 같은 온도에 도달했을 때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

최초의 온도 측정 장치는 써모스코프였다. 이것은 긴 튜브가 색깔 있는 물에 담겨 있고 그 끝은 유리구 형태로 되어 있다. 갈릴레오는 이 색깔 있는 물이 포도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641년에는 공기 대신에 액체를 사용한 온도계로 발전되었다. 이 때에는 알콜이 사용되었다. 1664년에는 알콜 대신에 빨간색 염료가 사용되었다. 1702년에는 두 개의 고정점이 눈금의 기초가 되었는데 눈과 물의 끓는점이었다. 이 온도계로 1708-1709년에 코펜하겐의 날마다의 온도를 기록했다. 온도계의 액체로 수은이 사용된 것은 1724년이었다. 수은의 열역학적 팽창은 크고 균일하다. 수은은 영하 38.9℃에서 356.7℃ 까지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액체인 수은은 뜨거워질수록 부피가 팽창하는데 이 팽창률이 일정해서 정확하게 눈금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수은은 유리에 붙지 않고 넓은 온도 범위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는 특성이 있다. 또 색깔이 읽기에도 좋다.
 

128. 토리첼리의 대기압 실험
7세기에 들어와 서양에서는 공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토리첼리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의 존재한다는 사실과 대기압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한쪽이 막힌 길고 두꺼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다음, 한 쪽을 손가락으로 막아 수은이 담겨진 그릇에 세우고 손가락을 떼었을 때 유리관 속의 수은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때 유리관 안에 남아있는 수은의 높이는 76센티미터였다.

이 실험에서 두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토리첼리의 진공"은 인류가 만든 최초의 진공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명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에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험결과 수은주의 상단에 진공이 형성됨으로써 오랫동안 고수되던 권위가 사라졌다. 이것은 곧 실험과학의 승리를 의미한다. 둘째, 수은주가 일정한 점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대기압의 작용 때문인데, 그 대기압은 수은주 76센티미터를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9. 파스칼의 원리 정립
유체정력학의 확립에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파스칼의 원리는 1652년 무렵에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종교가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 의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그것을 쉽게 풀어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용기 속에 있는 유체의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그 유체의 모든 부분과 용기의 안쪽 벽에 똑같은 크기로 전달된다."

이 원리가 가지는 과학사상의 의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이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던 진공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17세기 유럽의 과학계에서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대해 기계적 철학이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었으며, 그 가장 첨예한 대립 지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진공에 관한 문제였다. 사이펀이나 펌프가 일정한 높이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계적 철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고,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실험 등이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원리를 고수하려는 기존의 자연철학의 궁색한 설명들의 타당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파스칼의 일련의 기발한 실험들, 즉 물과 포도주의 비교실험, 머리부분의 모양이 서로 다른 유리기둥들을 사용한 비교 실험, 퓌 드 돔 실험, 진공 속의 진공 실험 등이 제시되면서 유체의 압력(당시에는 아직 '무게'라고만 생각했지만) 전달 현상에 관한 기계론적인 설명이 부인할 수 없는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30. 미적분법의 발견
미분학은 곡선의 접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적분법은 곡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법 자체는 그리스 시대부터 논해져 왔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적분법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은 1665년 대학으로부터 집으로 귀향하던 중에 그의 유명한 삼대 발견, 즉 빛의 분산, 만유인력의 존재, 미적분학을 이루어 냈다. 1687년에는 그의 역학 체계를 나타내는 대저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뉴턴 역학의 기초를 이루는 운동의 3대 법칙이 이 프린키피아에 기술되어 있는데, 1704년에는 3차곡선론, 곡선의 구적법을 발표하여 미적분법의 정식 설명을 공표하였다. 미적분학에 관한 계산법에 관해서는 라이프니츠와의 사이에 그 선취권에 관한 논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발표는 라이프니츠 쪽에서 앞섰지만 실은 이미 그 10년 전에 뉴턴이 발견,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와서 밝혀지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1675년에 새로운 계산법, 즉 미적분법을 발견하였고, 이 결과를 1677년에 발표했다. 1686년에 발표한 〈심오한 기하학 및 무한소 분석에 관하여〉 라는 논문에서 라이프니츠는 많은 초등 함수들의 적분에 관한 법칙을 실었고 적분 부호를 이용했을 뿐 아니라 미분과 적분을 서로에 대한 역연산이라는 사실까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부정적분을 정적분과 분리하여 적분상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1693년에 그는 초월함수를 급수로 전개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얻기도 했으며, 1695년에는 함수의 적을 n회 미분할 때 쓰이는 공식을 발표하였다. 여러 가지의 용어를 도입한 것도 그의 공적이다. 미분, 함수, 좌표, 미분방정식, 산법 등과 같은 용어는 그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계산법은 1696년에 로피탈(l'Hospital, 1661-1704)이 처음으로 저작의 모양으로 만들어 〈무한소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31. 세포의 발견
코르크는 원형질이 없이 속이 빈 세포가 규칙적으로 배열해있는 것으로, 부피생장하는 식물의 줄기, 가지, 뿌리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보호조직이다. 영국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당시에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하던 현미경을 이용하여 코르크를 관찰한 후, 이를 '작은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빌어 '세포(cell)'이라고 이름지었다. 1665년 그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상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그 구조를 상세하게 기술한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아 그가 관찰한 것은 세포 자체가 아니라 세포벽이었다. 또 당시 현미경의 성능상 한계로 더 자세한 세포 구조를 관찰하기 어려웠고 훅은 세포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800년대에 슐라이덴(Mathias-Jacob Schleiden, 1804-1881)이 식물세포설을 주장하고, 이어서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이 동물계까지 세포설을 확장시킨 후에야 비로소 생물의 구조적/기능적 기본단위로서의 세포의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포설의 등장으로 생물학은 발생학, 유전학 및 진화론에서 근대적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32. 뉴턴 고전역학의 성립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정립한 역학 체계는 아인슈타인이 나오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인류의 시공 개념을 장악했다. 흔히 고전역학이라고 불리는 이 역학 체계는 뉴턴의 힘에 관한 세 가지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 케플러가 제시한 행성의 타원 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만유인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역학 체계는 1687년에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책이다.

16-17세기에 진행된 과학의 혁명적인 변화를 흔히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뉴턴의 혁명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의 문제들을 역학적으로 완전히 설명하고, 갈릴레오에서부터 비롯된 역학의 혁명을 완결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뉴턴의 역학은 이후 호이겐스, 라플라스 등에 의해 더욱 정교화되었고, 이후 모든 물리 과학(physical science)의 기본이 되었다. 나아가 고전역학은 특정한 초기 조건과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방정식이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와 양자역학이 성립되면서 상당히 퇴색되었지만,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3. 증기기관의 탄생
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은 사람이나 가축, 흐르는 물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고 기원 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실제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증기의 힘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1698년에 영국의 토마스 세이버리는 증기를 응축시켜서 얻은 흡입력으로 광산의 물을 뽑아올리는 수동 밸브 펌프를 만들어 최초로 특허를 받았고, 1712년에 토마스 뉴커맨은 피스톤과 실린더를 이용해 작동하는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에 증기기관이 널리 전파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제임스 와트이다. 1765년 그는 뉴커맨 기관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분리 응축기를 도입하여 연료의 소비량을 뉴커맨 기관의 1/4 정도로 줄이는 중요한 기술적 진전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와트는 이전까지 왕복운동만 가능하던 증기기관이 회전운동도 할 수 있도록 개량함으로써 증기기관이 물 펌프 용도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동력으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공장들은 수력을 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가에 자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운송 채널이 다양하고 노동력이 풍부한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산업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4. 린네의 생물의 분류체계확립
1707년 스웨덴의 읍살라에서 태어난 린네(Linneaus, Carl, 1707-1778)는 18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식물학자이다. 흔히 '분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명법을 분류학에 적용한 학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생물계를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식물의 성에 관심을 두고 꽃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린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술의 수에 따라 식물계를 24개의 강으로 구분하고, 이명법을 사용하여 식물의 이름을 종과 속으로 나타내었다.

1737년 린네는 <자연의 체계>라는 책에서 분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종래의 방법보다 식물을 나누는 데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발표되자마자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유럽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그의 3대 저서중 하나인 1737년 <식물의 속>과 1753년 2권으로 된 <식물의 종>을 연속적으로 발간하여 분류학의 계통을 확립하였다. 린네의 분류법은 정적인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생물의 질적인 변화, 즉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자연관이 풍미하던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으로 꼽힌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식물의 분류 방법은 더욱 다이나믹한 사고에 의해 진전되어 상호 발생과 관련성을 중시하는 자연 분류체계의 발달로 이어진다.
 

35. 아크라이트 방적기의 등장
영국의 기술자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수력 방적기의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영국의 섬유산업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크라이트가 1769년에 특허를 얻은 기계는 종래에 이미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던 롤러드래프트 장치와 플라이어가 붙은 방차의 꼬기, 감기, 기구를 멋드러지게 결합한 것이었다. 이 방적기는 보통 수차로 작동했기 때문에 수력 방적기라 불렸다. 그의 방적기는 날실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공정을 연속화했을 뿐 아니라, 숙련공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인력 이외의 동력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방적 산업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후 그는 방적 공정과 그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기계를 유기적으로 결합, 배치하여, 이런 기계들이 공통의 동력으로 구동되는 생산 체계를 고안해내었다. 그는 이런 체계에 기반하여 대규모 방적 공장을 각지에 설립하고, 이것을 직접 경영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산업혁명기의 대표적 기업가로 손꼽힌다.

한편 그의 독점에 반대하는 면업 경영자들이 그의 특허에 소송을 벌여, 그의 특허는 85년에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착상이 비록 남의 것이었다고 판정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용화할 수 있는 기계로 발전시켜 근대적 공장제도를 창시하고 성공적인 경영관리 등을 이룩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86년에 그는 기사 칭호를 받았고, 87년에는 더비셔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36. 라부아지에와 화학혁명
18세기 무렵 화학은 다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로 영국의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기로부터 이산화탄소, 이산화질소, 산소 등의 성분기체들이 분리되고 그 성질들이 다양하게 연구되는 등 경험적 자료의 축적 면에서 상당한 성과들이 있었던 반면, 그런 자료들을 포함한 많은 화학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이 동원되고 있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말하는 플로지스톤은 어떤 때는 '비물질적 작인'으로 설명되다가 또 다른 경우에는 '물질'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하는 등 모호한 면이 있었고, 특히 금속을 태우는 실험에서는 결정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에 의해 상당 부분 바뀌었다. 그는 연소, 하소, 호흡 현상을 플로지스톤이 아닌 산소의 출입으로 설명하여 정량적인 실험 결과를 뒷받침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량적, 체계적인 실험과 일반화라는 태도를 화학에 뿌리내리려 했다. 나아가 원소와 화합물 사이의 구분, 더 기본적으로는 물질의 개념을 명확히 하려 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화학명명법 체계의 수립을 시도했다. 1789년에는 이런 성과를 담은 화학분야 최초의 교과서와 전문학술지도 나왔다. 흔히 '화학혁명'이라 부르는 18세기 후반의 이런 다소 급격한 변화과정을 거쳐 화학은 하나의 독자적인 전문과학분야로 자리잡아 갔다.
 

37. 연소 원리 규명
1772년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한 최초의 실험을 하였다. 이는 화학 혁명을 향한 극적인 첫 발이자 라부아지에에 의한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론의 폐기라는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내내 화학 전반을 설명해 주는 이론 체계였던 플로지스톤 이론은 16세기 의화학을 창시한 파라켈수스가 제창한 것으로, 1700년경 독일의 화학자 슈탈(Georg Ernst Stahl)이 체계화하였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가연성 물질에 포함되어 있고 불에 탈 때 연기와 불꽃으로 빠져 나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금속은 불에 탈 때 산화하여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는데, 이는 플로지스톤 이론의 반박증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 유황, 인 등의 화합물로 실험한 다음,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1774년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의 독특한 성질을 인식한 영국의 기체 화학자 프리스틀리의 연구 등에 힘입어,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가장 활력있고 가장 순수한 요소'를 산소로 정의하였으며 계속되는 연구에 의해 물의 전기분해를 밝히고 공기 중의 연소 이론을 완결지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산소가 갖는 역할을 최초로 발견해 낸 것으로, 화학이 연금술에서 탈피하여 근대 과학의 한 분야로 정착되면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8. 갈바니의 동물 전기 발견
18세기는 라이든 병이 발명되고, 천둥이 전기방전 현상으로 설명되는 등 전기현상에 관한 초기의 연구들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 점은 생리학이나 해부학 같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생체에 미치는 전기의 영향, 특히 전기충격이나 전기뱀장어의 충격과 같이 생체가 나타내는 전기현상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1791년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갈바니(Luigi A. Galvani, 1737-1798)는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다리를 절개하다가, 개구리 다리의 근육신경조직을 두 가지 다른 금속 조각들에 접촉시켜 놓으면 개구리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당시에 전기 현상에 관심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류 현상에 대한 착상을 하게 하여 전기에 관한 연구의 방향을 크게 돌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자였던 갈바니 자신은 이것을 동물전기 현상의 한 가지이며, 전기뱀장어처럼 개구리의 다리가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실험기술은 동물의 신경자극 같은 복잡한 현상의 전기화학적인 성질을 밝히기에는 아직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9. 쿨롱의 법칙 발견
뉴턴은 물체 사이에는 항상 인력이 작용하며, 그 크기는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 과학자들은 화학결합이나 전기적 힘에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실이 바로 쿨롱의 법칙이다.

원래 프랑스의 토목공학자였던 쿨롱(Charles Augustin de Coulomb, 1736-1806)은 전기를 띤 물체들 사이에 중력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전기력이 존재함을 보이고, 그에 바탕해서 전기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이것은 전기력에 대한 구체적인 수학적 법칙을 제시한 것에 머물지 않고 18세기에 널리 유행한 뉴턴주의(Newtonianism)를 더욱 강화하였다. 쿨롱의 법칙 자체는 이후 맥스웰 방정식의 한 가지로 수학적으로 더욱 정교화 되었고, 이는 전자기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이 법칙은 여러 전기 법칙을 이끌어 내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오늘날 전하의 양을 표시하는 단위로 쿨롱(C)을 사용하는데, 이는 전기력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쿨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40. 지층의 원리 정립
17세기 아일랜드의 한 성직자는 구약성서에 나온 여러 사건의 경과 시간을 계산하여 아예 지구의 탄생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오전 9시라고 못박았다. 퀴비에(Cuvier)같은 생물학자도 대홍수로 전체 생물종이 바뀌었다고도 하였다. 교회의 논리가 과학에 적용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출신 허튼(Hutton, 1726∼1797)은 1795년 <지구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지구의 지형을 조사한 결과 지구 표면의 구조가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썼다. 허튼의 주장은, 성경에 바탕하여 대홍수와 같은 급격한 지구활동으로 짧은 시기에 지구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기존의 수성론(nepunism), 또는 격변론(catastrophism)에 반대되는 화성론(vulcanism), 균일론(uniformitarianism)으로 불리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라이엘(Lyell, 1797∼1875)은 유럽과 북미에서 행한 지질 조사를 근거로 허튼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했다. 라이엘은 지상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은 과거와 같은 속도,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작용이 누적되어 큰 결과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지층 층위론(stratigraphy)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라이엘은 지층 분석을 통해 지표에 가까울수록 현재와 유사한 생물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여 지층에 따른 시대 구분을 하였다. 그 결과 지구의 나이가 적어도 수십억 년이어야 함을 보였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비글호 항해 중 라이엘의 책을 읽고 지구의 나이가 그토록 길다면 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허튼과 라이엘의 연구는 지질학의 발전 뿐 아니라 진화론의 탄생에도 결정적이었다.
 

41. 종두법 시행
천연두는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얼굴에 천연두 감염의 영구적인 흔적인 곰보자국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한 번 천연두에 걸린 사람은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국, 인도, 중동에서는 천연두 환자의 딱지를 코로 들이쉬거나 부스럼에서 나온 고름을 미감염된 사람의 팔에 낸 상처에 대는 방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했는데 이를 인두접종(人痘接種)이라 한다. 인두접종은 1717년 터키 주재 영국 대사의 아내가 영국에 처음 도입하여 서구의 천연두 사망률을 크게 낮추었으나, 인두접종에 의해 오히려 천연두에 걸리거나 전염될 위험부담이 있었다.

안전한 천연두 예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영국의 의사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였다. 그는 자신의 환자 중에 우두에 감염된 소에게 전염된 후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사례가 있음을 발견하고, 관찰 끝에 우두가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96년 우두에 걸린 소의 부스럼에서 약간의 액을 채취하여 건강한 소년에게 옮겨 천연두를 예방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년은 인간의 천연두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두에 대한 예방접종을 받은 첫 번째 사례가 되었고, 우두접종은 인두접종보다 높은 안전성과 예방효과를 나타냈다. 제너의 백신 덕분에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마침내 근절되었다고 발표했다.
 

42. 볼타전지의 발명
18세기는 초기의 전기현상 연구에서 많은 발견과 발명이 이어진 시기였다. 1745년에 무셴브뢰크가 라이든 병을 발명함으로써 정전기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18세기 중엽 프랭클린이 천둥을 전기방전현상으로 설명하였으며, 1780년대에는 쿨롱에 의해 쿨롱의 법칙이 증명되었다. 18세기 말 경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에 의해 처음으로 전지가 만들어짐으로써 전기현상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파비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볼타는 갈바니가 실험·보고한 개구리 다리의 전기 현상을 갈바니와는 달리 물리적 전기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는 개구리의 다리는 종류가 다른 두 가지 금속의 접합에 의해 발생하는 전기의 민감한 검출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종류의 금속을 조합하여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금속의 종류에 따라 전기현상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했다. 이어 1799년에 금속 쌍을 산성 용액에 담그고, 잠기지 않은 두 끝을 연결하면 회로가 생겨 전기가 계속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 원리를 이용해 최초의 화학전지를 발명했다.

볼타가 만든 '전지'는 단발적인 전기 방전을 만드는 데 그치던 당시의 라이든 병과는 달리 전기가 계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장치였다. 그것은 당시 조금씩 생기고 있던 '전류'라는 개념으로 성큼 다가선 것이었다. 전지의 발명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전기에 관한 획기적인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43. 기체팽창법칙 발견
기체의 성질에 관한 연구는 근대 과학이 탄생한 이래 과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탐구되어 왔다. 그 결과 기체의 압력, 온도, 부피 사이의 관계가 각각 보일, 샤를에 의해 발견되어 그들의 이름을 따라 보일의 법칙, 샤를의 법칙이라 불리게 되었다. 보일의 법칙이란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라는 것이고 샤를의 법칙이란 일정한 압력 하에서 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기체에 대한 연구는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어 왔지만 기체의 상태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기체 분자 운동론이 발달하면서부터이다. 이 이론은 기체를 분자나 입자의 형태로 단순화시켜 기술하는 이론으로서 볼츠만과 맥스웰이 그 기초를 쌓았다. 이에 따른 기체 운동 모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체는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많은 동일한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자들은 분자의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둘째, 분자 상호간의 충돌이나 용기 벽과의 충돌은 에너지 결손이 없는 완전탄성충돌일 뿐이고 분자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셋째, 분자간의 운동 에너지의 변환된 형태가 열이다. 이런 단순화된 가설을 이용함으로서 앞의 두 가지 기체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
 

44. 기차의 등장
철도의 기원은 광산업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처음에 철도는 탄광 내부에서 사용되다가 점차 탄전 지방과 공업 지역을 잇는 운송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많은 기술자들은 매끄러운 레일과 차륜을 직접 접촉시켜 그 마찰로 기차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1804년 트레비틱(Richard Trevithick)은 시속 4마일의 증기기관차를 세계 최초로 제작하였다. 증기 기관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븐슨(George Stevenson)은 1814년에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속 12마일의 증기 기관차를 개발하였다. 세계 최초의 철도라 할 수 있는 리버풀-멘체스터 철도는 1830년에 개통되었는데 스티븐슨이 개량한 로켓(Rocket)호가 시속 14마일로 달림으로써 철도에 대한 붐을 일으켰다.

1850년대와 1860년대를 거치는 동안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철도를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마차와 운하는 기차에게 지배적인 운송 수단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철도의 발달을 계기로 국내 시장의 단일화가 이루어져 지방 경제는 국민 경제의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철도 건설은 금속, 연료, 기계 등을 대량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산업 부문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철도 건설과 운영에는 엄청난 자본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철도를 매개로 근대적 대기업이 형성되었다. 철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표준화 작업도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궤간의 크기가 4피트 8.5인치로 통일되었고 전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표준 시각이 정해졌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19세기는 철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 돌턴의 원자설 등장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아득한 고대부터 존재했다. 돌턴은 오랫동안 기체의 여러 가지 성질을 연구하던 중, 여러 가지 기체의 물에 대한 용해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각종 기체들이 무수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모든 기체는 각기 고유한 작은 입자들로 되어 있어서 이 입자의 크기에 따라 물에 대한 용해도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그의 최대의 공적인 원자설이 탄생하게 되었다.
돌턴은 1803년 원자설의 대체적인 구상을 끝내고 1808년에 원자설을 세상에 공포했다. 돌턴은 모든 원소의 원자는 공과 같이 둥근 모양이라고 상상하고 이것들의 모형을 만들어 화합물의 구조를 원자 개념으로 모형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돌턴의 원자설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원자설과 거의 비슷하지만, 원자의 질량을 특히 강조한 것은 돌턴의 학설의 특이한 장점이다. 돌턴은 수소 원자를 표준으로 하고, 그 원자량을 1로 정한 다음 다른 원자의 원자량을 결정하려고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틀린 부분도 많지만 그 당시의 정량 분석 방법이 아직도 유치했고 돌턴의 실험 기술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턴의 원자량의 결함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화합물의 식을 가장 간단한 식으로 표시하려는데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고 합리적인 기초도 없었다. 그러나 화학 변화가 일어날 때 여기에 관여하는 물질의 무게 변화에 규칙적인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원자설에 의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돌턴의 원자설의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46. 아보가드로 가설
돌턴의 원자설, 즉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설과 게이 뤼삭의 기체 반응 법칙을 동시에 모두 성립시키는데는 아보가드로의 분자설이 필요하다. 1811년 아보가드로는 "같은 부피 속에 들어있는 기체의 분자 수는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같다"는 분자설을 발표했다. 게이 뤼삭이 기체 반응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한 산화 질소 반응을 돌턴의 원자설과 결합시켜 합리적으로 이 두 가설을 성립시키려면 필연적으로 아보가드로의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이 아보가드로의 법칙이 곧 학계에서 채택이 되었던들, 그 후에 원자량의 혼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은 1858년에 그의 제자인 칸니자로에 의해 인정될 때까지 약 50여 년을 암흑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파묻혀 있었고, 자신의 학설이 세상에서 인정되어 빛을 보기 몇 해 전에 아보가드로는 80세의 긴 일생의 막을 내렸다.

당시에 이 법칙은 아보가드로의 가설이라고 불렸다. 이 가설은 현대 화학의 이론 체계를 세우는 근본을 확고히 하였다고 할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돌턴의 원자설의 결함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1860년 칼스루에에서 열린 만국 화학 회의에서 화학 기호의 통일 문제를 협의하였을 때, 아보가드로의 제자인 칸니자로가 그의 업적을 소개하여 비로소 아보가드로의 위대함이 인정받았다. 그의 가설은 오늘날 아보가드로의 '법칙'이라 바꾸어 일컬어지고 있다.
 

47. 뵐러의 요소유기합성 성공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유럽에서는 무기화학은 광물분석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전해 있었던 데 비해, 유기화학분야는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 주된 걸림돌 중의 하나는 생기론의 영향이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유기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유기체에만 있는 이른바 '생명력'의 작용이 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유기물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몸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을 뿐 무기물로부터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특별한 현상인 생명과 관계되는 유기물은 무기화학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본적인 화학법칙에 반드시 따르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유기물질에 대한 화학적인 접근을 크게 위축시키고 있던 이런 생각들은 1820년대에 독일의 화학자 뵐러(Friedrich Wöhler, 1800-1882)가 무기물인 시안산과 암모니아로부터 대표적인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해냄으로써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뵐러 당시의 실정으로는 시안산의 염류는 동물의 뿔이나 혈액 등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생명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기론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은 10여년 후 콜베와 베르텔로가 탄소, 수소 등의 원소로부터 직접 유기화합물을 합성해냄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러나 뵐러의 요소합성은 생기론에서 벗어나 곳곳에서 유기합성을 시도하도록 방향선회를 시켰다는 점에서 초창기 유기화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48. 콘크리트 제조
건축 기술은 19세기에 시멘트와 강철이 사용됨으로써 현격히 발전하였다. 시멘트에 대한 특허는 1824년에 아스프딘(Joseph Aspdin)이 취득했으며, 대규모 시멘트 공업은 1850년대에 포틀런드(Potland) 시멘트가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을 섞고 물을 가하면 단단한 콘크리트가 된다. 한편, 1850년대부터 각종 제강법이 개발되면서 강철이 건축물에도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899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인기를 독차지한 에펠탑은 강철이 수직 건물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술적 전통은 철근 콘크리트(reinforced concrete)를 통해 결합되었다. 즉, 철근으로 망을 먼저 세운 다음 그 주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그 철근이 콘크리트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는 1867년에 모니에르(Joseph Monier)가 개발한 후에 지속적인 개량을 거쳐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콘크리트를 주형하는 과정에서 철근을 잡아들이는 압축 콘크리트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외벽이 얇거나 하중이 큰 건축물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빌딩은 오늘날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이 되었다. 또한, 콘크리트는 거대한 굴착 장비의 발전과 결합되어 도로나 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공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49.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탄생
1820년대에는 기하학에 있어서 대혁명이 발생하였다. 1826년 2월 로바체프스키는 유클리드의 평행성의 공리를 부정하고, 〈평행상의 직선 l 밖의 한 점을 지나서 이 평행선의 주어진 직선 l과 만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직선을 그을 수 있다〉라는 공리를 설정한 새로운 기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소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헝가리의 볼야이도 로바체프스키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같은 기하학을 만들었다. 가우스도 같은 생각에 도달하여 있었지만 공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폰슬렛(Poncelet)은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1822년에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사영기하학에 있어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혔고, 이 논문은 오늘날 사영기하학의 한 기초를 이루었다. 몽제(Monge), 카르노(Carnot) 등의 프랑스 수학자들에 의하여 고안된 사영기하학의 연구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50.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법칙
1831년 영국의 과학자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했다. 182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나침반, 즉 자기장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패러데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석을 움직여 주면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전자는 전동기의 원리이고 후자는 전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인 발전기의 원리이다. 전자기 유도법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발전기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전기와 자기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독특하고 중요한 물리 개념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개념과 전자기 법칙에 대한 수학적 정식화는 패러데이의 후배 물리학자 맥스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패러데이는 1834년 전기분해 실험을 통해 '패러데이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전기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전해질 용액에 전류를 흘려줄 때 전극에서 생성되는 물질의 양은 화학 당량의 정수배가 되는데 1당량은 흘려준 전기량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기념하여 '패럿(farat)'이라는 단위로 전기분해할 때의 전기량을 표시하고 있다.
 

51. 전동기 발명
1796년 볼타가 전지를 발명함으로써 전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이래, 1820년에 외르스테드가 전류의 자기작용을 발견하고 1831년에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는 등, 19세기 전반에는 전기학상의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견과 함께 전기의 힘으로 기계적인 작업을 하는 장치인 전동기의 개발도 다각도로 시도되었다. 이미 1821년에 패러데이는 전기를 흐르게 한 철사 주위에 자석을 회전시키는 장치를 고안한 바 있으며, 전자기유도현상이 발견된 직후에 앙페르의 기계공이었던 픽시(H. Pixxi)는 최초로 회전하는 전기발생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험실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1834년에 러시아의 기술자 야코비(M.H. von Jacobi)는 실제의 작업에 사용될 수 있는 최초의 전동기를 개발하였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전동기 40대를 하나로 묶고 320개의 전지를 사용하여 선박을 가동시켰다. 1842년에는 영국의 기술자 데이비드슨(R. Davidson)도 전동기로 선반을 가동시키고 2인승 전차를 만들어 달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의 시도는 대체로 전지를 사용한 것이어서 경제성이 떨어졌고 따라서 산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전동기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전기의 발달을 기다려야 했다.
 

52. 다윈의 진화론 등장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함께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의 자존심을 추락시킨 2대 이론으로 불리곤 한다. 지동설이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낸 것처럼 다윈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숭이를 닮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격렬한 종교적, 윤리적 논쟁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인류 과학사에 큰 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다윈은 1809년 영국 잉글랜드 서부 지방인 실즈베리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825년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했으나 의학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는 채집과 표본 조사로 시간을 보내곤 했으며, 이후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목사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한 후 지질학과 생물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다윈은 1831년 영국 해군의 조사선 비글호에 승선하여 이후 5년간 세계 각지를 탐험했다. 그는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군집과 한 종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보고, 그처럼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은 원래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인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1837년 무렵부터 다윈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으며, 진화의 메커니즘이 '경쟁'일 것이라고 보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말에 정립된 생물학의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거대 이론의 하나로서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과학 이론이다.
 

53. 사진술의 등장
1839년 프랑스의 한 화가가 세계 최초로 동판에 요오드화은을 칠한 감광판을 사용해서 사진을 찍은 이후, 1851년에는 면화약을 에테르에 녹인 코로디온을 칠한 습식 유리판이 발명되어 사진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습판 사진술은 초상 사진과 보도 사진에 적합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을 계기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습판 사진술은 감광성 물질이 빨리 부패되기 때문에 암실에서만 사진을 찍어야 했고, 습판을 만들어서 현상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여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해 낸 사람은 아마츄어 사진가에서 기업체의 사장으로 변신한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다. 유리판에 유제를 칠하지 않는 건판 사진술은 1871년에 발명되었는데, 이스트먼은 이것을 개량하여 1880년에 상업화하였다. 또한, 그는 유리판을 계속해서 젤라틴 감광유제로 코팅시켜 주는 기계도 발명하였다. 이러한 혁신을 통하여 전문 사진사나 고급 아마추어의 작업은 매우 간편화되었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크고 다루기 힘든 것이었으며 건식판은 과거의 습식판만큼 깨지기 쉽고 무거웠다. 이스트먼은 1885년에 롤 필름을 개발하고 두루마리 필름걸이 시스템을 발명함으로써 유리판을 사용하던 기존의 시스템을 대체하였다. 그는 1888년 롤 필름을 사용하는 코닥이라는 간단하고 값싼 카메라를 개발하여 대중 시장에 접근하였다. "당신은 버튼만 누르세요 ― 나머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코닥 카메라는 엄청난 부피의 사진기 세트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손쉬운 사진 촬영의 길을 터놓았다. 1888년에 이스트먼은 올해의 사진왕으로 뽑혔고, 그 해는 진정한 사진술이 발명된 해로 기록되었다.
 

54. 탄소14연대측정법 등장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가 하나 새로 발굴되었다. 언제적 유적인지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을까? 만약 그 유적지에서 타다만 곡식 한 알이나 무덤 속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발견된다면 연대 추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탄소14 연대 측정법을 쓰면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에서 4-5만년 전 사이에 살았던 유기체나 그런 유기체를 가공해 만든 물체의 원래의 유기체의 사망시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 추정의 중요성이 지대한 고고학, 지질학, 지구물리학 등의 분야의 연구에 날개를 달아 준 이 탄소14 연대 측정법은 20세기 중엽인 1940년대에 방사화학의 성과에 힘입어 개발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방사화학자 리비(William F. Libby, 1908-1980)와 그의 학생들의,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인 탄소14(14C)의 성질과 그것의 생성과정에 대한 일련의 연구에 의해 개발되었다. 탄소14 연대측정법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속의 탄소의 조성, 즉 탄소 중의 탄소14의 농도와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세포 중의 탄소의 조성은 시기와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반면, 죽은 유기체는 죽는 순간부터 몸 속의 탄소 중의 탄소14의 농도가 일정한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는 원리에 바탕을 둔 연대 측정법이다.
 

55. 외과수술의 시행
외과수술은 1800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우선 마취술의 개발과 발전으로 수술할 때 통증을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술이 없었던 시절에는 큰 수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1840년대부터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효과를 발견하여 마취제로 사용하면서 외과수술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마취제를 사용하면 그전까지는 불가능했던 수술을 할 수는 있었지만, 수술 부위에 심한 염증이 생겨 크게 고생하거나 심지어 죽는 일이 수없이 생겨났다. 그러던 19세기 후반 파스퇴르와 코흐와 같은 생리학자들이 병원균이 감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래, 리스터의 무균처리법을 비롯하여 소독과 멸균기술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염증 문제도 해결의 길이 열렸다.

외과수술이 해결해야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출혈이었다. 외과수술시에 출혈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는데, 출혈이 심해지면 환자는 쇼크에 빠지는 등 부작용이 생기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다. 이 문제는 란트슈타이너가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후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지면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외과수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어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56. 절대온도 개념 성립
온도라는 개념은 역학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양인 질량, 길이, 시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1780년에 샤를은 모든 기체는 온도가 증가하면 부피가 같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체의 부피 팽창 계수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두 개의 고정점 대신에 하나의 고정점을 갖는 온도 스케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 아이디어로 인해 이제까지 액체를 넣어 제작해 왔던 온도계에 다시 기체가 사용되게 되었다. 기체 온도계에 대한 실험에서는 기체의 종류가 변하더라도 그에 따른 온도 스케일의 변화가 거의 미미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낮은 압력의 기체를 사용한다면, 온도계에 사용되는 물질의 종류에 의존하지 않는 온도 스케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모든 기체는 이상기체처럼 행동하고 온도(T)와 압력(P), 부피(V)간에 아주 간단한 관계식이 성립한다.

PV=nRT      (n : 상수)

이 때의 온도를 열역학적 온도라고 하고 지금은 온도의 근본적인 측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스케일에서 0도가 자연스럽게 정의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온도가 0도가 되려면 이상기체의 압력이 0이 되어야 한다. 1933년에 국제무게질량위원회에서 이 고정점을 물의 3중점으로 받아들였다. 물의 3중점이란 물, 얼음, 수증기가 평형으로 함께 존재하는 점이다. 그 값은 273.16으로 정해진다. 이 온도의 단위는 켈빈경의 이름을 따서 켈빈이라고 하고 K로 나타낸다.
 

57. 엔트로피 법칙의 발견
19세기의 에너지 문제는 열과 일의 합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주울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열의 칼로릭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혀 있었다. 1850년 클라우지우스라는 과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노의 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어 열기관의 열효율이 두 온도에만 관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열은 다른 아무런 변화 없이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흐를 수도 있으며,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카르노의 원리가 증명된 것이다. 이듬해에 톰슨도 카르노의 원리를 증명했는데, 그는 그 증명을 다른 아무런 변화 없이 주위로부터 열을 흡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바탕했다. 이런 증명들에서 클라우지우스와 톰슨이 사용한 경험적 사실들, 또는 사실들의 경험적 불가능성이 바로 열역학 제 2 법칙의 내용이었다.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를 수는 있지만 낮은 온도로부터 높은 온도로는 저절로 흐르지 않으며, 일은 열로 바뀔 수가 있지만 열은 일로 바뀔 수가 없다는 것이다. 클라우지우스는 1850년 이후 오랫동안 열역학 제 2 법칙의 더 일반적이고 완전한, 그리고 수학적으로 정리된 표현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그 후 15년에 걸친 이 같은 클라우지우스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졌다. 클라우지우스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물리적 양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일에 집중했고, 15년의 끈질긴 노력 끝에야 비로소 그는 그처럼 항상 증가하는 양을 정의할 수 있었다. 이 양에 엔트로피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에너지'라는 단어와 되도록 유사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58. 베세머 제강법 등장
19세기 중반에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1856년에 영국의 발명가 베세머가 해결했다. 그는 전로에 녹은 무쇠를 주입하고 공기를 불어넣어 용융강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방법을 따르게 되면 선철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규소, 망간, 탄소가 산화되면서 선철이 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화열이 강을 용융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베세머법은 생산성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10톤의 철을 정련하려면, 기존에 사용하던 정련로와 퍼들로로는 각각 3주와 3일이 걸리던 것을, 베세머법에서 사용하는 전로로는 10-20분 정도가 걸릴 뿐이었다. 그러나 베세머법은 종래의 연철 생산법보다 훨씬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이 실용화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베세머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공학 분야에서 구조 재료는 강철이 목재를 완전히 대신하였고, 또한 레일이나 선박, 그리고 대포 제작용의 재료도 강철로 대체되었다. 값싼 강철은 19세기 후기의 제국주의의 대양 무역과 철도, 그리고 항구의 개발과 함께 열대 식민지의 개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59. 내연기관의 등장
내연기관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도 존재했지만 그 실현을 위한 본격적인 모색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이다. 프랑스의 르노와르(J.J. E'tienne Lenoir)는 1860년에 최초의 내연기관을 발명하였다. 그것은 가스와 공기의 혼합 기체가 전기 불꽃에 의해 점화되면 폭발하면서 동력을 내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르노와르 엔진은 구조가 복잡하고 연료 소모가 많아서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르노와르 엔진 이야기를 들은 독일의 오토(Nikolaus A. Otto)는 상업적 가치가 있는 엔진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흡입, 압축, 폭발, 배기의 4가지 행정으로 이루어진 오토 사이클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고, 이에 입각한 내연기관을 개발하여 1867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그 후 1890년까지 내연기관의 제조를 독점한 오토 기관은 약 35,000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르노와르 엔진과 오토 엔진은 모두 석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수송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는 1883년에 다이믈러(Gottlieb W. Daimler)가 가솔린을 원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함으로써 돌파되었다. 다이믈러의 엔진은 1885년에 각각 다이믈러의 오토바이와 벤츠(Karl Benz)의 자동차로 상업화되었다. 가솔린 엔진의 개발을 계기로 인류는 자동차와 석유에 의존하는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60. 멘델의 유전법칙 등장
멘델의 유전법칙은 아마추어 과학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이룩된 인류의 큰 자산 중의 하나이다. 그의 유전법칙은 처음에는 무시되어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지만 십 여년이 지난 후 그 가치가 공인되기에 이르렀고, 오늘날 유전학의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현재 체코 공화국의 영토인 슐레지엔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은 수도사로서 은둔 생활을 하던 1865년 세 가지 유전법칙, 즉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 우성의 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이론은 거부당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851년부터 3년 동안 빈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한 멘델은 1854년부터 14년간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그의 유명한 완두콩 실험은 이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1856년부터 시작된 완두콩 교배를 통한 실험으로 그는 1865년 브륀 자연사 학회에 논문을 제출했으나 그의 연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낙담한 그는 더 이상의 연구를 단념했다. 멘델이 죽은 지 16년이 지난 1900년 세 사람의 식물학자 드 브리스(Hugo De Vries), 코렌스(Carl Correns), 자이제네크(Erich Tschermak von Seysenegg)가 그의 논문들을 재발견했다. 이들은 멘델의 논문에 기반해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이해하고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멘델에서 비롯된 이 분야의 학문은 이후 영국의 과학자 베이트슨(William Bateson)에 의해 '유전학'이란 용어로 정착되었다. 멘델에서 비롯된 유전학은 형질을 전달하는 '유전자'가 발견되고, 급기야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61. 대형발전기의 등장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전지를 대체할 수 있는 전기 발생장치로서 발전기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기들은 절연된 철사를 코일로 감아 그것이 철제 영구자석의 자기장 안에서 기계력에 의해 회전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성능이 좋은 영구자석이라도 극히 약한 자기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발전기는 효율이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

독일의 기술자이자 기업가인 지멘스(Ernest W. Siemens)가 이 한계를 돌파하였다. 그는 1856년 기존의 발전자를 개량하여 T형 이중 발전자를 제작한 후 1866년에 이 발전자를 활용하여 자기 여기 방식의 발전기를 개발하였다. 그의 발전기는 강철의 영구자석 대신에 발전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류를 사용한 강력한 전자석을 사용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는 전자석의 철심에 전류가 흐르지 않아도 적은 양의 자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코일을 돌려주면 다시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이점도 있다. 지멘스는 발전기의 응용 분야로서 전차에 주목하였다. 그는 1879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전차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지멘스의 회전목마"라는 애칭을 얻었다. 1881년에는 세계 최초의 전기철도가 대중교통기관으로서 베를린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1890년이 되자 유럽과 미국의 많은 대도시에 전차선이 구축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1882년에 에디슨에 의해 전력의 상업화가 가능해지면서 지멘스의 발전기는 공장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62. 다이나마이트의 발명
다이너마이트는 스웨덴 화학자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이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을 함유한 폭약의 총칭이다. 1846년 이탈리아의 소브레로가 최초로 합성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위력은 당시까지 사용되던 흑색화약에 비해서 매우 강했지만, 충격이나 마찰에 의해 쉽게 폭발했을 뿐 아니라 액체상태였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어려웠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정확하게 폭발시키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여 뇌관을 발명했으며, 1866년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상태로 만들기 위해 규조토에 흡수시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의 보급으로 폭발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노벨도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실험을 계속하여 보다 폭발력이 크고 효율적인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다. 그는 약 355종류의 특허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영한 15개의 화약공장을 기반으로 모은 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유산으로 기증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노벨은 원래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길 바랬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는 산업자본을 이룩한 구미각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63. 대서양횡단 해저전선 부설
1830년대 후기에 탄생한 전신 기술은 해저에 전선을 부설하여 대륙 간에 통신망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1848년에는 독일의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가 해저 전선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절연체를 개발했다. 2년 후 영국의 도버와 프랑스의 칼레를 잇는 첫 번째 해저 전신 부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고, 1851년에 두 번째 전선이 시도되어 마침내 성공하였다. 이 해저전선이 설치됨으로써, 런던과 파리의 주식거래소는 주가에 대한 정보를 당일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20년간 계속하여 전신에 이용되었다.

대서양 횡단 해저 전선은 1858년에 아일랜드와 미국 뉴펀들랜드 간에 연결되었으나 케이블의 절연 실패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최초의 성공적인 상설 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은 1866년에 놓여졌으며, 1865년에 일부가 세워졌던 또 다른 해저 전선 역시 1866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이 전선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이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자본가 C. W. 필드와 영국의 과학자 켈빈경이었다. 이 전선의 성공에 이어 세계 각지의 바다에 잇달아 전신해저전선이 부설되었다. 세계의 주요 전신 해저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거의 부설되었으며, 1913년에 총 길이 52만km에 달했다.
 

64. 주기율표 완성
19세기에 많은 새로운 원소들이 추출되고 성질이 밝혀졌지만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산발적으로만 이어졌다. 더욱이 1860년대에 70여 가지에 이르는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고 그 원소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면서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이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이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탁월하며 비상한 지능을 자랑하던 러시아 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emitri Mendeleev, 1834-1907)는 낱장의 카드를 통해 다양한 원소들의 기저에 버티고 있는 일련의 통일성을 찾아내었다. 그는 원소들의 원자량과 대표적 성질을 낱장의 카드에 적고 카드들을 죽 늘어놓았는데, 원자량에 따라 정렬해 보니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성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1869년 주기율표를 제출하였다. 주기율표를 통해 원소들의 체계를 잡은 멘델레에프는 그때까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의 존재까지 예견하였는데, 실제 이 예상은 1875년 갈륨, 1879년 스칸듐, 1885년 게르마늄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멘델레예프 외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이어(Lothar Meyer), 드 상쿠르투아(Alexandre-Emile Beguyer de Chancourtois) 등도 비슷한 주기율표를 발표했지만, 명쾌한 설명과 발견 원소의 성질을 과감히 예측한 점 등 때문에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표준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65. 맥스웰 방정식 성립
오늘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 기술은 물론 전자기학의 모든 법칙의 기본이 맥스웰 방정식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 물리학과는 달리 '장(field)'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영국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정식화한 4개의 방정식은 이후 전자기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와 자기를 측정 가능한 단일한 힘으로 합쳤다. 이 방정식에 의해 전자기파의 존재가 예언되었고,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임이 밝혀졌다. 모든 전자기 법칙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전자기학뿐만 아니라 색깔론, 천체 역학, 기체 분자 운동론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고전적 장 개념을 발전시켜 장이론과 자신의 방정식을 정식화하였다. 그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서 벗어나 전류가 흐르면 도선 주위의 공간의 성질이 바뀐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당시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믿어진 에테르를 이용해서 전자기 현상을 설명했다. 에테르의 개념은 이후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지만 맥스웰 방정식은 자연계의 가장 중요한 방정식의 대열에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맥스웰 방정식이 제시하는 물리량의 수학적 형태가 물체의 운동에 변함없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66. 타자기의 발명
근대 타자기의 원조에 해당하는 레밍턴 타자기는 1874년에 등장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출품된 레밍턴 타자기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자기의 확산 속도는 매우 느려 1880년까지 팔린 타자기의 수는 단 5천 대에 불과하였다. 당시로만 해도 활자로 된 글은 오직 선전 광고뿐이었고 타자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인격적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직장의 구체적인 일까지 산업화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타자기의 판매율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888년에는 5만대의 타자기가 팔렸다.

타자기에 얽힌 다른 이야기는 QWERTY로 알려져 있는 자판의 배열순서이다. 레밍턴 터자기를 제작했던 숄즈(Christopher L. Sholes)는 처음에 자판을 알파벳 순으로 배열했다. 그는 글쇠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알파벳의 순서를 바꾸어 실험을 계속하다가 현재의 자판 배열을 확정하였다. 그 후 QWERTY보다 더욱 간편하고 효율적인 자판 배열이 여러 번 제안되었지만 기존의 자판 배열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기존 관행의 견고함이나 교체 비용의 막대함이 기술적 우수성을 눌렀던 것이다. 최근에는 첨단 기술 제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지배 디자인의 위력을 뜻하는 용어로 "QWERTY 경제학"이 사용되기도 한다.
 

67. 전화의 발명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바꾸어 놓은 통신 수단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전화였다. 전화의 기본 원리는 소리를 여러 가지 주파수의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원래의 소리처럼 들리도록 재생하는 것이다. 1831년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금속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냄으로써 전화의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1861년까지는 아무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소리를 전송하진 못했다. 독일의 요한 필리프 라이스는 1876년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소리로 전환하는 간단한 기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조잡해서 모든 영역의 주파수를 다 전송하지 못했고, 따라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

최초의 실용적인 전화는 미국의 엘리샤 그레이와 스코틀랜드 태생인 알렉산더 그레함 벨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믿을 수 없게도 두 사람은 같은 날 특허출원을 냈는데, 벨이 그레이보다 두 시간 빨라서 벨에게 특허가 주어졌다. 최초의 전화 교환국은 1877년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설치되었다. 최초로 교환국이 도시간에 연결된 것은 1883년 뉴욕, 보스턴 간이었다. 미국 외에서 최초로 교환국이 설치된 곳은 1879년 런던이었는데, 교환국에는 큰 스위치판과 그 앞에서 일하는 교환수가 있었다. 교환수는 결려오는 전화를 받고 수동으로 전화 받을 곳에 연결하였다. 동전을 넣는 공중 전화기는 1889년 하트포드의 월리엄 그레이의 특허이다. 그리고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는 1923년 프랑스의 안토니 바르네가 개발하였다. 이동 전화는 벨 전화 회사에서 개발되어 1924년 뉴욕 시경이 사용하였다. 1946년에는 최초의 상업적인 이동전화가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1978년 벨 연구소는 미국 전화 전신 회사(AT & T)를 설립하고 지역을 육각형의 셀로 나누는 방식의 이동 전화 시스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통화자가 탄 자동차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면 자동 전환 시스템이 다른 셀로 방해 없이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것이다. 이후 셀룰러 방식의 전화 시스템은 1981년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68. 전등의 발명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편리하게 쓰이는 전등은 1879년 토마스 에디슨과 영국의 조셉 윌슨 스완 경에 의해 동시에 발명되었다. 그러나 전등의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11년 험프리 데이비 경이 두 전극 사이의 방전에 의한 빛을 발견하면서부터 전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의 가로등으로 실험적으로 설치된 것은 아크등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크등은 너무 빨리 타 버렸기 때문에 비실용적이었다. 이 문제는 적당한 전도체, 또는 필라멘트를 용기나 유리구 안에 필라멘트가 타지 않도록 산소 없이 집어넣는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스완은 최초로 전등을 개발했으나, 그 역시 전등 안을 진공으로 유지하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에디슨이었다. 1879년 10월 21일 그는 40시간 동안 빛난 탄소 필라멘트 전등의 연구 결과를 직접 실험해 보였다. 1880년 말에는 1500시간을 견디는 16와트 전등을 만들었고, 이것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기 기구의 역사상 가장 많은 발명을 한 발명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1910년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윌리엄 데이비드 쿨리지는 전등의 수명을 크게 연장시킨 텅스텐 필라멘트를 발명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등은 아르곤이 아트 전압이 낮은 관계로 보통 아르곤 85%와 질소 15%의 혼합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열손실을 감소시켜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해 필라멘트를 코일 모양으로 치밀하게 감아 사용하고 있다.
 

69. 전자발견
원자(atom)의 어원은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의 그리스어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원자는 단단한 당구공 같은 것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믿었다. 1897년 영국의 조셉 톰슨은 원자 내부에 질량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음의 전기를 띤 아주 작은 입자, 즉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자와 뒤이은 원자핵의 발견은 "원자핵 주변에서 전자가 어떻게 분포하는가?" 하는 원자 구조의 문제를 낳았다. 특히 닐스 보어의 원자 구조는 최외각 전자들의 분포를 통해 화학 결합의 원리, 주기율표에서 여러 물질들이 비슷한 특성을 보이는 이유 등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자의 발견은 양성자, 중성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 수많은 소립자 발견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 소립자들을 통해 우리는 물질과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전자를 이용한 기술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는데, 특히 전자의 파동성에 기반한 전자현미경을 쓰면 물질 분자를 관찰할 수 있다. 또 TV의 음극관은 금속을 가열할 때 광전자가 방출되는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70. 영화의 등장
영화는 활동사진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박물학자 마레(E.J. Marey)는 1888년에 권총형 사진기를 개량하여 감광판을 회전시켜 새의 잇따른 자세를 1초에 12회 촬영하였다. "연속기록사진장치"로 불린 마레의 카메라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촬영기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88년에 자신의 발명품인 축음기와 활동사진을 결합하여 1초에 48장의 사진을 찍는 활동사진 카메라를 만들었다.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 불린 그의 영사기는 카메라로 찍은 음화를 양화로 만들어 구멍을 통해 직접 육안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에디슨의 스튜디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곳곳에서는 5센트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번창하였다. 5센트 극장은 대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우는 일이나 화면을 크게 하는 일에 과감히 투자하였다. 이에 반해 에디슨은 흥미보다는 교육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하였고, 스타나 화면과 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영사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에디슨의 사업전략은 점점 소비자의 기호와 멀어지게 되어 에디슨은 "영화를 발명했지만 영화사업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71. 헤르츠에 의한 전자기파 확인
1860년대 초 맥스웰은 이전까지와는 약간 다른 방식을 이용해서 오늘날에도 전자기학의 뼈대가 되는 네 개의 맥스웰 방정식을 만들어 내었다. 맥스웰이 만들어낸 방정식들을 연립해서 풀면 파동 방정식이 나오는데 맥스웰은 그 파동의 속도를 계산해내었다. 계산 결과는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전자기파가 존재한다고 예언하고,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따라서 빛과 전자기파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맥스웰이 전자기파를 예언한 후, 1888년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는 이러한 전자기파가 존재하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는 전자기파를 발생시키는 장치(진동자)와 전자기파를 받는 장치(공진자)를 만들었다. 포물선 반사경을 사용하여 평행하게 진행하는 전자기파를 만들어 반사, 굴절, 회절, 간섭 등의 실험을 하여 전자기파와 빛이 같은 성질의 것임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맥스웰의 전자기파 방정식의 옮음이 증명되었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과 그에 따른 헤르츠의 실험은 원격적인 중심력을 기초로 한 뉴튼적 자연관을 대신하여 전자기적 자연관이 과학사상에 새로이 등장하게 함으로써 자연 인식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72. 자동차 발견
자동차가 바퀴 이래 교통 수단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이라는 견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동차의 기본 전제는 간단하다. 소나 말이 끄는 탈것을 하나 골라서 모터를 달아 스스로 달리는 수레로 만드는 것이다. 현대적인 자동차의 시조는 1771년 프랑스의 전쟁성 장관 니콜라스 조셉 컥넛이 만든 파르디에라고 하는 증기 동력의 삼륜차였다. 이 기계는 말이 끄는 것보다 느리고 운전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생산되지는 않았다. 역시 프랑스인인 앙드 볼르는 1873년 12인승 증기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은 마차와 속도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실용적인 자동차의 발명이 있기까지는 실용적인 내연기관의 발명을 기다려야 했다. 1889년 독일의 고트리브 다임러와 빌헬름 메이바흐는 기념비적인 교통 수단을 탄생시켰다. 이 자동차는 1.5마력의 4단 변속과 2기통 휘발유 엔진으로 시속 16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또 다른 독일인 카를 벤츠도 같은 해에 휘발유로 가는 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19세기의 휘발유 자동차는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진귀한 물건으로 단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최초로 대량 생산된 자동차는 1901년 미국의 랜섬 E. 올스가 개발한 커브드 대시 올스모실이었다. 현대적인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일괄 조립 라인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의 작품이다. 그는 1896년부터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었다. 1908년 모델 T 자동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이래 1927년 생산 중단할 때까지 1800만대가 넘는 자동차가 포드의 조립 라인을 빠져 나갔다.
 

73. 에너지 보존의 법칙 성립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열, 전기, 자기, 빛,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형태만 바뀔 뿐, 그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열기를 사용하면 전기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이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만 열로 바뀔 뿐이다. 또 이 열로 물을 끓여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이 수증기로 터빈을 돌리면 열 에너지는 다시 역학적 에너지로 바뀐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따로따로 이해되던 열, 전기, 자기, 운동, 빛 등의 현상을 에너지라는 개념을 통해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물체에 열을 가해 무엇인가를 하고 나면 그 열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임스 줄은 열이 역학적인 일로 바뀌고, 또 역학적 일은 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열, 전기, 역학적 일 등이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어떤 것, 즉 에너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너지 보존 법칙은 영구기관을 만들려는 오랜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 여러 사람들을 실망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영구기관이란 한 번만 작동을 시켜주면 더 이상 외부에서 일을 해주지 않아도 그 작동이 영구히 지속되는, 따라서 연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장치를 말한다.
 

74. X선의 발견
1879년에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s)는 저압의 기체를 넣은 관에 고압의 전류를 흘리면서 알 수 없는 선이 음극으로부터 방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보통 직선으로 진행하며 자기장의 영향을 받으면 구부러졌다. 그는 이 선을 음극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극히 작은 대전된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여 음극선(cathode ray)이라 불렀다. 1895년에 독일의 뢴트겐(Wilhelm von Röntgen)은 크룩스관을 이용하여 음극선을 금속에 부딪치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선이 대단한 투과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투명한 물체도 통과한다는 점을 알았다.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 그녀의 손을 그 선으로 찍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선이 발생하는 원인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는 X선이란 용어를 붙였다.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 발표한 뢴트겐의 논문은 과학계, 의학계 및 일반인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X선은 인간이나 기계의 조직을 진단하기 위하여 의학계 및 산업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뢴트겐은 1901년에 노벨 물리학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한편, X선이 발생하는 원인은 당시 과학계의 중심 과제로 떠올랐고 이에 관련된 많은 연구활동은 방사능과 방사성 원소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75. 무선통신의 등장
전신과 전화는 모두 통신 기술 시대의 도약을 가져온 큰 발명품들이다. 하지만 전파의 발견은 전신이나 전화보다도 더 큰 통신의 새 시대를 열었다. 전파를 발견한 것은 1887년 독일의 과학자 헤르쯔였다. 그러나 최초로 전파를 통신에 이용하여 한 사람은 귀리엘리모 마르코니였다.

1895년 마르코니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자기 집 근방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무선 전파 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1898년 유진 뒤크리테와 에르네스트 로제는 파리 시를 가로질러 무선 송신을 하였으며, 1899년 3월 28일에는 마르코니가 영국의 도버에서 프랑스의 위메레까지 50킬로미터를 지나는 무선 통신에 성공하였다. 마르코니는 이어 2년 뒤인 1901년 12월 12일, 영국의 폴두에서 뉴펀들랜드까지 무려 33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최초로 대륙간 무선 통신에 성공하였다. 1903년 마르코니가 메사추세츠의 사우드웰포리트에 호출부호 WOC인 송신국을 세웠을 때, 봉헌식에는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에드워드 7세 국왕의 축하 메시지 교환도 있었다. 1904년 마르코니는 최초의 선박, 해변간 통신 시스템인 커나드 증기선에 무선 통신을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1912년 타이타닉호의 참사 등 여러 해난 사고에서 인명 구조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무선 통신은 그 후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레이저에 의한 통신이 실용화 단계에 와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앞으로의 무선 통신은 정보화 사회와 깊이 있게 맞물려 함께 시대를 선도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76. 방사능 발견
방사능이란 물질 원자가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1897년 앙리 베크렐은 우라늄 화합물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강한 에너지가 저절로 방출되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퀴리 부부는 우라늄 이외의 방사능 물질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각각 폴로늄과 라듐으로 이름지었다. 방사능의 발견은 과학적인 면에서, 또 실용적인 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먼저 물리학자들은 방사능 연구를 통해 방사선의 본질, 원자핵 변환에 관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본격적인 핵물리학 연구로 이어졌고, 마침내 원자탄의 원리가 되는 인공 연쇄 핵분열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원자핵 에너지는 무기 제작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핵 에너지는 화석 연료와 더불어 주요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을 한다. 그에 따라 방사능 핵폐기물 등의 문제가 새로이 대두되기도 했다. 한편 방사능 물질들은 의학, 농업, 고고학 연구 등에도 이용되고 있다. 병원에서는 피부병과 항암 치료에 방사선을 이용한다. 방사능 동위 원소를 이용하면 유물의 연대기 측정이나 동·식물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물질 대사를 추적할 수 있다. 또한 방사선을 품종개량이나 식품 보존에도 활용하고 있다.
 

77. 인간의 혈액형 발견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의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외과는 수술기법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두드러지게 진보했다. 마취술과 수술부위의 감염을 막는 무균처리법이 발달하면서 수술의 성공률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수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출혈 문제는 해결해야 할 또다른 장벽이었다. 출혈이 심해지면 쇼크 등의 부작용이 생기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된다. 출혈이 불가피하다면 그만큼의 혈액을 환자에게 공급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19세기까지의 수혈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았다. 그 이유는 혈액형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900년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였다. 사람의 혈액은 적혈구에 어떤 응집원이 있느냐에 따라 A, B, O, AB형으로 구분되는데, 각 혈액의 혈청에는 자기 것이 아닌 응집원에 대항하는 항체가 있어 다른 혈액형의 혈액과 만나면 응집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 시기의 수혈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은 바로 다른 혈액형의 혈액을 제공하여 환자의 체내에서 응집반응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 이후 수혈 때는 반드시 동일한 혈액형의 혈액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혈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졌다. 그 덕분에 심한 출혈을 하는 부상환자나 많은 출혈이 예상되는 대수술도 무사히 실시할 수 있게 되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78. 플랑크의 양자가설
20세기의 전환기에 막스 플랑크는 양자 이론을 탄생시킴으로서 물리학의 근본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플랑크가 양자를 발견한 배경에는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을 괴롭힌 '흑체 복사(blackbody radiation)'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가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용광로처럼 가열된 구멍에서 복사되는 빛은 밝은 황색에서부터 적색, 청백색 등의 여러 가지 스펙트럼을 발산한다. 1884년 스테판의 추론을 같은 해에 볼츠만이 이론적으로 설명한 온도와 복사에너지의 관계는 총에너지=σT4 라는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총에너지는 단위 면적당 단위 시간에 흑체에서 복사되는 에너지이고 T는 절대온도이다. 복사열의 성질은 순전히 온도와 파장에 달려 있고 물체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다. 즉 고전 법칙에 의하면 모든 복사 에너지를 흡수한 물체의 복사라면 열과 빛은 자외선 파장에서 방출해야 한다.

플랑크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흑체 복사를 예측하는 공식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단위 또는 다발로 복사된다는 가정을 사용하였다. 즉 에너지는 길이나 무게와 같이 연속적으로 어떤 값이든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플랑크 상수와 진동수를 곱한 만큼의 값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E=hν 라는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이고 ν는 진동수이다. 플랑크는 1900년 12월 양자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여 양자물리학을 탄생시켰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양자설을 이용해 광전효과를 설명했고, 1913년 보어는 플랑크의 접근법이 담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원자모형에 이용해 원자 내부에서 전자가 양자화된 특정 궤도 상에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79.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심리학
"가장 기이하게 여겨지는 꿈이 가장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꿈이 '무의식으로 통하는 왕도'이며, 억압된 욕망이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성욕과 같은 감추어진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근원을 성기에 대한 부러움과 거세 공포라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심리 발달을 전생애적으로 보게 하였다. 프로이드는 이 주장을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용어로 집약하였다.

오스트리아 유태인 가정 출신인 프로이드는 의대를 졸업한 후 신경학자에서 정신 병리학자로 전환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하였다.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는 1896년 무렵 <히스테리 병인론>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책에서 히스테리의 주된 원인이 성욕이라고 주장하여 의사회에서 사퇴하기까지 하였다. 고독한 연구 끝에 발간된 <꿈의 해석>(1900)에서 무의식 세계를 보임으로써 프로이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일부에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이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무의식과 충동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비판을 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심리학, 정신의학, 문학, 예술,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80. 진공관 발명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교통과 통신의 혁명은 산업과 생활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통신 분야는 마르코니가 1890년대에 발전시킨 무선통신의 상업화와 그 뒤를 이은 여러 발명, 특히 진공관에 의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진공관 발명의 역사는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으로부터 시작한다. 1883년 그는 새로운 백열전등을 개량하는 일을 하면서, 전류가 전등의 탄소 필라멘트와 양전하된 금속판 사이의 진공 속을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현상의 대단한 실용성을 예견하지 못하고 '에디슨 효과'라는 이름만을 붙인 채 전등을 개량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에디슨 효과'에 주목하여 이극 진공관을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플레밍(John A. Fleming, 1849-1945)이었다. '플레밍 밸브'라 명명된 이 진공관은 흔히 다이오드라 불리기도 하는데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 작용'을 한다. 진정한 전자시대를 연 삼극 진공관은 미국의 발명가 드 포리스트(Lee de Forest, 1873-1961)가 발명했다. 예일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극 진공관의 필라멘트와 금속판(양극) 사이에 제어 그리드를 삽입하여 삼극 진공관을 최초로 만들었는데, 이 장치는 신호의 '증폭'도 가능한 것이었다. 신호의 증폭이 가능해지자 통신 거리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텔레비전, 라디오 등에 응용되면서 방송 시대를 이끌어 내었다.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모든 전자제품에는 진공관이 사용되었다.
 

81.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비행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은 고대의 신화나 설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오랜 꿈이자 숙원이었다. 이러한 꿈을 최초로 실현시킨 것은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에 의해 발명된 뜨거운 공기를 이용하는 기구(balloon)였다. 그러나 기구는 마음먹은 대로 방향을 바꾸기 힘들고 속도가 느리다는 등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세기의 발명가와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탈것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상상의 수준을 넘어 '조종이 가능한 동력 비행기'를 실제로 만드는 것에는 숱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문제를 결국 해결한 이들이 미국의 윌버 라이트(1867-1912)와 오빌 라이트(1871-1948) 형제였다. 독일의 발명가인 오토 릴리엔탈의 실험 기사를 읽고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된 그들은 1896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고, 1903년 12월 17일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키티 호크에서 최초의 동력 비행을 성공시켰다. 라이트 형제의 발명은 곧 유럽으로 건너가 주목을 끌었다. 특히 1909년에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이 만든 비행기로 영국 해협 횡단을 성공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이내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상용 비행이 생겨났다. 본격적인 항공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82. 상대성 이론 등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적이고, 이 둘은 원래부터 우주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똑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간이나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체들 사이에는 중력법칙에 따르는 인력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고전 물리학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했고, 천체나 대포알 같은 거시 세계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의 근원은 관측자 자신에게 있고, '3차원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4차원 시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상대성 이론의 여러 개념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거시세계에서는 4차원 시공간의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의 큰 매력은 여러 물리 법칙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준다는 데 있다.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근원에 대해 설명할 뿐 아니라, 우주 팽창같은 거시 현상에서 극미의 원자 세계를 아우르는 통일된 이해 방식을 제공한다. 이런 이론은 매우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원자탄이 터질 때 나오는 에너지의 양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도 응용된다.
 

83. 라디오 방송의 시작
인간의 말소리를 전파에 실어보낸다는 생각은 마르코니에 의해 무선 전신이 상용화된 후 여러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꿈이었다. 단순히 모스 부호를 통해 통신을 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음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꿈을 달성한 것이 바로 벨에 의한 전화의 실용화와 라디오 방송의 실용화였다.

라디오 방송은 190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랜트로크의 해변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물리학자 겸 발명가였던 레지날드 페센덴에 의해 시작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전파를 스파크에 의존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연속파(continuous wave) 기술과 전파를 증폭할 수 있는 삼극 진공관이 발명되면서 가능해졌다. 이 두 기술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기술적 성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였다. 1906년의 역사적인 첫 방송이 있은 후 여러 해 동안 라디오 방송은 고작 무선 통신의 한 분야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 11월 2일 KDKA 방송국에서 최초의 상업 방송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사람들의 귀와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지방 문화를 변화시켰으며 가정을 비롯한 주요한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후 라디오 방송은 화상을 함께 전하는 텔레비전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으나, 여전히 인류의 주요한 문화이자 대중 매체로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84. 모건의 초파리 돌연변이 실험
1910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흰눈을 가진 수컷 초파리 한 마리가 태어났다. 당시에는 돋보기로 보아야 겨우 구분이 가능한 이 초파리의 탄생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유전학은 발생학 연구의 한 갈래 정도로만 인식되어 모건조차 발생과정의 돌연변이를 연구하기 위해 초파리를 도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초파리를 키울 빈 우유병과 먹이인 바나나가 뒹구는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실험실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돌연변이 초파리가 탄생하였고, 모건은 암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여러 돌연변이를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와 흰눈 유전자와의 연관으로 설명하였다. 모건은 그해 유전자가 염색체에 존재한다는 '염색체이론(Chromosome theory)'을 <사이언스> 지에 3페이지 짜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염색체 속에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후 유전학 연구는 염색체의 구조와 복제에 집중되었으며, 결국 DNA 구조 발견으로 이어지는 현대 생물학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성 연관 돌연변이 초파리가 발견되자 모건은 제자인 스터트반트(Sturtevant)와 함께 염색체 상의 유전자들의 상대적 위치를 나타내는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다. 오늘날 유전자 연구에서 사용하는 유전자 지도가 바로 그것이며 이 업적을 기려 유전자의 상대적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를 모건이라 부른다. '파리 방'이라 불린 당시 모건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던 스터트반트와 뮬러(Muller), 브리지(Bridges)는 현대 유전학을 이끌어갔다. 모건은 염색체 이론 정립의 공으로 1945년 유전학자로는 최초로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다.
 

85. 초전도 현상의 발견
초전도 현상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체의 전기 저항이 0이 되는 현상으로, 1911년 카메를링 오네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저항이 없는 초전도체는 전류가 흘러도 열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초전도체를 이용하면 적은 에너지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백금, 구리같이 전도성이 큰 도체도 저항이 0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현재의 송전에서는 에너지 손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초전도체를 송전에 이용한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에너지 손실 전혀 없이 전기를 보낼 수 있다.

또 초전도체로 전자석을 만들면 작은 양의 전기로도 강한 자기장을 얻을 수 있다. 철로에 전자석, 기차 바닥에는 초전도 코일을 장착하면 한 번의 전류 공급으로도 충분히 강한 자기장을 만들어 기차가 뜨게 할 수 있다. 기차가 뜨면 선로와의 마찰이 없으므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자기부상 열차의 원리다. 문제는 초전도 현상이 주로 -256∼-245℃ 정도의 극저온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6년, -260℃에서 초전도 현상이 관찰되었고 그후 -175℃까지 임계온도가 올라갔다. 이러한 고온 초전도체에 관한 연구 덕분에 초전도 현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86. 대륙 이동설 등장
대륙이동설은 독일의 기상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가 1912년 경에 제안한 가설이다. 그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세계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유럽 대륙은 원래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 이 초대륙을 판게아라고 하고 북쪽을 러시아 대륙, 남쪽을 곤드와나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대륙이동설은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남극 등의 대륙까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전세계는 하나의 거대 대륙과 그것을 둘러싼 바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열하여 현재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바로 대륙이동설이다.

현재 세계지도를 잘 보면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동쪽의 돌출부와 아프리카 대륙 적도 부근의 움푹 들어간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베게너는 이것에 착안하여 대담한 새로운 설을 제창한 것이다. 마치 그림 맞추기 퍼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에 그는 대륙이동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남미, 아프리카 양 대륙에서 동일한 종류의 고대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것 등으로 이것이 대륙이 연결되었던 증거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대륙이동설은 1920년대 말까지 활발하게 논의되었지만 그 후 1930년대에는 거의 잊혀졌다가 고지자기학(古地磁氣學)의 덕분으로 1950년 말에 새롭게 되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87. 냉장술의 발달
19세기 중엽부터 기계적 냉장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면서 각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냉장고 사업에 뛰어들었고 1920년대에는 가정용 냉장고가 시판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가정용 냉장고는 가스 흡수식과 전기 압축식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전기 압축식에서는 압축기라는 별도의 전기 펌프가 냉매의 기화와 응고를 조절하였던 반면, 가스 흡수식은 냉매가 가스 불꽃에 의해 가열되고 물에 흡수되면서 농축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압축기로 인하여 윙윙하는 소리가 심하게 났던 전기 냉장고에 비해 가스 냉장고는 매우 조용하였고, 가스 흡수식에는 작동 부품이 거의 없어서 작동 비용도 저렴하였으며 유지 및 정비도 용이하였다.

이처럼 가스 흡수식이 매우 간단하고 편리한 기술인데도 불구하고 전기 압축식이 냉장고 시장을 석권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충분한 자본을 바탕으로 전기 냉장고 제조업체들은 냉장고의 개발에 막대한 물적·인적 자원을 투자하였으며 적극적이고 기발한 광고 및 판촉 활동을 벌였다. 반면 가스 냉장고 제조업체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이어서 막대한 개발비를 적시에 공급하지 못했고, 도중에 사업을 포기하는 업체가 많아서 건전한 경쟁이 유발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등장한 전기 압축식은 지금도 지배적인 냉장고 패러다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88. 텔레비전의 개발
움직이는 영상을 전자기파를 이용해 먼 곳으로 전송하는 아이디어는 19세기부터 이론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정지 화상을 전송하는 장치는 실제로 제작되었다. 움직이는 영상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데는 셀레늄의 성질이 이용되었다. 셀레늄은 1817년에 발견된 화학 원소로, 사진에서 은 화합물이 빛에 민감하듯이 이 물질의 전기 저항은 빛에 민감하게 변한다. 1884년에는 독일의 파울 니프코브가 영상을 여러 가지 강도의 평행한 선으로 바꾸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텔레비전은 영상을 셀레늄 셀을 통하여 기록하고 전송하는 과정이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블라디미르 코스마 조르킨이 1924년에 발명한 이코노스코프도 텔레비전의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코프는 영상을 캐소드 튜브의 광전지 셀에 투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셀에서는 빛의 세기에 비례하는 전류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주사하면 비디오 신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이코노스코프는 요즘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수상관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니프코브의 발견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지만, 최초의 실용적인 텔레비전을 만든 것은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존 로지 베이드였다. 그는 1923년 주사선이 8개인 텔레비전의 특허를 얻었고, 1926년에는 송수신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초의 영국 공영 방송에 사용되었다. 1927년 벨 전화 회사는 전화선을 이용하여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을 하였다. 1928년 베이드는 단파를 이용하여 런던에서 뉴욕으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방송을 하였다. 영국 방송사는 1930년 베이드의 텔레비전이 개선되어 시장에 나오자 정기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베이드의 발명은 즉각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939년까지는 영국에서 2만 명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35년 에펠탑 위에 텔레비젼 송신기가 설치되었고, 미국에서는 1936년 RCA가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 송신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으로 인해 텔레비전의 보급이 늦어져, 온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89. 양자역학의 성립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띠고 있으며, 에너지는 양자화되어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가 체계화시킨 양자역학은 이러한 대상의 운동을 기술하는 이론이다. 이는 우리에게 미시 세계를 이해할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생각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고전역학의 체계에서는 운동방정식을 알면 그 물체의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고 결정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어떤 속도로 어떤 조건에서 출발했는지 알면, 어느 시각에 어디를 지나게 될 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는 파동방정식을 풀더라도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위치에서 소립자를 관찰할 확률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관찰을 시도한다 해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물질의 본성은 관찰 방법에 의존한다. 즉 빛과 입자는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지지만, 현실에서는 관찰 방법에 따라 입자나 파동 중 한가지로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의 결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는 미시 세계를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핵 에너지나 반도체의 전기적 성질에 관한 연구이다.
 

90.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약은 인류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왔던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탄생한 귀중한 산물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20세기에 앞다투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약들 중에서도 페니실린은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희망을 안겨 준 '기적의 약'이라고 불린다. 페니실린은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우연히 발견하였다. 1928년, 그는 포도상구균 계통의 화농균을 배양하다가 우연히 한 개의 배양접시에서 세균무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는 배양접시에 곰팡이가 자라면서 세균이 자라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레밍은 실험 끝에 페니실리움속에 속하는 곰팡이가 생산하는 물질이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냄을 확인하고 이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 년뒤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1968)와 체인(Ernst Boris Chain, 1906-1979)은 페니실린을 정제하여 결정 형태로 생산하였으며, 몇 차례의 동물실험을 통해 페니실린의 강력한 항균작용을 입증하였다. 이후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페니실린은 2차대전 때 상처의 염증으로 전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수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페니실린의 개발로 인류는 항생제의 시대를 열었고 세균과의 싸움에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91. 우주의 팽창 발견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주를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고대부터 지금까지 별들은 늘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음은 너무나 강해서 알버트 아인슈타인같은 물리학자도 '우주상수'를 도입하는 실수를 할 정도였다.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에서 우주가 팽창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럴 리 없다며 우주가 팽창하지 않도록 우주상수를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학자들이 팽창 우주론을 주장했다. 마침내 1929년 에드윈 허블이 관측을 통해 증거를 찾아내자 아인슈타인도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말았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먼 과거에는 지금보다 별들이 더 가까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한 점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 즉 시간의 시작이 있음을 뜻하는 이 이론이 바로 빅뱅이론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미래는 어떨까? 우주는 무한히 계속 팽창할까? 아니면 대파국이론이 주장하는 대로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수축하여 다시 한 점으로 모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대파국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팽창우주론 연구는 근본물질에 대한 이해,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들에 대한 이해를 한차원 높여 주었다.
 

92. 입자가속기 건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높은 속도 또는 에너지를 갖도록 가속하는 장치이다. 가속기 건설은 자연 상태보다 고에너지 입자를 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자연방사능 원소에서 얻는 입자는 전자, 감마선, 알파 입자에 한정되어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1932년 이후로 점점 더 중요해져 가고 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러더퍼드의 실험 이후에 입자의 가속이 핵변환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최초의 가속기는 미국에서 1925년경 만들어졌다. 가속기는 가속시키는 입자가 전자인지 양성자인지, 또는 다른 입자인지에 따라 구별하기도 한다. 양성자 가속기의 대표적인 예는 미국 페르미연구소의 테바트론을 들 수 있다. 테바트론은 1983년에 가속빔의 에너지를 1TeV로 증가시켰으며, 86년에는 양성자-반양성자 충돌형 가속기로 개조하여 충돌에너지를 2TeV로 증가시켜 운영하고 있다.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는 이를 이용하여 여섯 종류의 쿼크 중 아직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톱쿼크를 찾는 노력을 게속하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고 또 입자들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물리학자들은 입자들을 더 강하게 충돌시켜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입자들을 연구하려고 한다. 이 중의 하나는 힉스보존을 찾아내는 일이다. 미국의 초전도 수퍼 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프로젝트는 취소되었고, 현재로서는 유럽의 대형 하드론 충돌기[Large Hardron Collider]가 최선의 방법이다. LHC 프로젝트에는 45개국의 4,000명의 과학자와 공학자가 참가한다. 클린턴 대통령의 과학자문은 이것은 공전의 국제적인 협동작업이라고 언급했다.
 

93. 컴퓨터 발명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계산을 편리하게 해주는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세기의 과학자 파스칼이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컴퓨터의 시조이다.

파스칼의 계산기는 주판과 그 원리가 비슷했지만, 톱니바퀴 열에 의해 수학적 조작을 했다는 점이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타자기가 개발되자 계산기도 그 영향을 받아 자판을 붙여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작된 것이 펠트가 1887년 시장에 내놓은 자판형의 '컴프토미터'였다. 컴퓨터의 개발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은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춘 기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원래 19세기 초의 배버지라는 사람이 처음 고안한 아이디어인데, 1930년에 아이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재발견된다. 아이킨은 배버지의 기계식 대신 전기 기계식의 방식을 도입하여 실용화에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이를 펀치 카드 원리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현대식 컴퓨터의 원형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후 컴퓨터는 하버드 마크Ⅰ, 에니악과 유니박, 집적 회로 등의 발명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단일 결정에 연결 회로와 함께 집어넣은 것으로서 이후 반도체 기술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94. 원자로 건설
우라늄 핵과 같이 핵분열이 가능한 물질에 중성자가 충돌했을 때 물질은 붕괴하여 2개의 서로 다른 원자를 생성하고 많은 열을 생성한다. 이를 핵분열 과정이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성자들이 새로 발생하게 되고, 이들 중성자는 다른 원자들이 연쇄적으로 분열하도록 할 수 있다. 원자로의 기본 원리는 원자폭탄과 같다. 다른 점은 원자폭탄의 경우 이러한 연쇄 반응이 제어되지 않는 반면, 원자로의 경우에는 그것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어된다는 것이다. 핵분열 과정에서는 엄청난 양의 열이 발생한다. 1파운드(0.45kg)의 우라늄이 핵분열을 할 때 생성되는 열은 석탄 1,500t을 태우는 것과 맞먹는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전력 생산을 위한 원자로에서 많은 양의 열을 생산하는 데 이용된다.

최초의 원자로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페르미에 의해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제조계획인 소위 '맨해튼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1942년에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물리학자 팀이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경기장 콘크리트 관중석의 지하에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을 제작한 것이다. 그 후 1954년에는 소련에서 최초로 실용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그에 뒤이어 영국과 미국에 공업적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95. 최초의 원자탄 폭발
1905년 아인슈타인이 질량-에너지 등가법칙(E=mc2)에 의해 예언한 원자폭탄은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연쇄반응을 발견하고,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대학 축구장 지하의 비밀 실험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듦으로써 가시화되었다. 급기야 '맨해턴 계획'을 통해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네바다의 한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자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인류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세계 각국은 원자력 발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발전소를 대거 건설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발전량의 거의 50%를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핵폐기물 때문에 인류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더욱이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짐으로써 인류는 전혀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게 되었으며, 방사능으로 인해 유전적 변이가 생겨 부모 세대의 전쟁의 상처가 그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후 지속된 핵무기 경쟁으로 인간은 지구를 70번이나 초토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발하면 인간도 한 때 지구를 지배하다 멸종한 공룡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96. DNA구조 규명
한 생물체가 지니는 모든 형질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유전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 사람은 멘델이었으나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30여 년이 지난 1900년 몇 명의 학자들에 의해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됨으로써 유전은 생물학계의 중심적인 탐구주제가 되었다.

이후 5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유전자가 DNA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이에 따라 일군의 학자들이 DNA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53년 케임브리지대학 캐번디시연구소의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가 염기들의 상보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중나선 구조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단순히 DNA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DNA의 복제 기제까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생물이 한 개체 또는 한 종으로서 나타내는 형질들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실체가 규명되고, 크릭이 분자생물학의 중심원리라 부른 'DNA의 유전정보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발현된다'는 사실이 확립되면서 생물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자생물학이라는 분야가 새로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DNA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생명공학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97.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이 쏘아 올린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는 미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과학 기술의 우위를 믿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미사일 격차라는 참담한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 1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으로 과학기술 특별 보좌관을 임명하고 기존의 과학 자문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1958년에는 연방 과학 기술 회의가 설립되어 산업계, 행정부, 대학의 핵심 인물들이 과학 기술 정책의 주요 이슈를 토론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은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를 줄이고 더 나아가 소련을 추월하기 위한 항공 우주 기술의 개발을 크게 고무시켰다.

스푸트니크의 충격은 미국이 과학 교육 체제를 정비하는 계기로도 활용되었다. 미국의 많은 언론들은 소련에 뒤진 주된 이유를 미국의 체계적이지 못한 과학 교육에서 찾았고 급기야 미국 의회는 1958년에 국가 방위 교육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을 통하여 미국 정부는 과학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10억 달러라는 거금을 지출하였다. 그 결과 고등 교육 기관에 입학한 학생의 수는 1957년에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1968년에는 700만 명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또한, 초등 교육 기관에서 고등 교육 기관에 이르는 전 교육 과정에서 과학 교과목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교과 과정을 개편하기 위한 노력이 잇따랐다.
 

98. 인류의 달 착륙
1958년 소련이 지구 둘레의 궤도를 선회하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 성공시키며 우주 경쟁 시대를 선포하자, 이에 자극 받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가 지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후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1969년 7월 20일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후 4시 17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인 달착륙선 이글호가 달에 착륙했다.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사령선에서 떨어져 나온 이글 호는 선장 닐 암스트롱과 조종사 에드윈 앨드린에 의해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후 10시 56분 암스트롱은 4개의 연동 바퀴가 달린 착륙선의 문을 열고, 황량하고 가루처럼 흙이 뒤덮힌 달 표면 위에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인류가 달나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암스트롱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 장면을 시청하고 있던 약 6억 명의 지구인들에게 "오늘 나는 나의 자그마한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전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사령선을 타고 달 주위를 궤도 비행하고 있는 동안 19분 후에 조종사 앨드린이 암스트롱과 합류했다. 그는 물 한 줄기, 공기 한 줌도 없는 '고요의 바다'의 달 표면에 내디디며 '장엄하고 황량한' 기분을 표현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은 1971년 화성 궤도로 발사된 마리너 9호, 1976년 무인 우주선 바이킹 1호에 의한 화성 탐사를 촉진시킴으로써 우주의 보다 먼 곳에 대한 탐사를 활발하게 했으며, 영구히 궤도를 도는 우주 정거장을 경유하여 지구와 달 사이에서 인간과 장비를 운반하는 스페이스 셔틀 체제의 개발을 구상하게 했다. 실제 셔틀 체제가 구축되면 달이나 기타 행성을 거주지로 삼거나 태양계 밖으로의 우주 탐사 여행이 더 이상 공상과학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가능해 질 것이다.
 

99. 시험관 아기 탄생
1978년 7월 25일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어머니의 몸밖에서 수정된 아기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시험관에서 수정되었다고 해서 '시험관 아기'라 불린 루이스 브라운은 현대 의학의 기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결혼한 부부 10쌍 가운데 보통 1쌍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불임의 원인으로는 우선 정자의 수와 운동성이 정상, 즉 1ml 안에 2천만 개 이상이어야 하고 이 가운데 60% 이상이 운동능력이 있는 것에 미치지 못할 때를 들 수 있다. 정자가 정상이더라도 남성이나 여성 어느 쪽의 문제로 난자가 생성되는 나팔관까지 가지 못하면 수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자를 가느다란 관으로 여성의 자궁에 주입하는 인공수정이나, 정자와 난자를 나팔관 끝 부분에 넣어 수정을 유도하는 나팔관수정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팔관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거나 나팔관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시험관 아기는 이런 경우에 정자와 난자를 2∼3일 동안 아예 시험관에서 키워 수정시킨 후 어머니의 자궁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이다. 생명의 수정이 시험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다.

이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 브라운은 어머니의 몸 속에서 자라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8년 그녀는 어엿한 숙녀로 언론에 나와 유치원 보모나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우리 나라도 1985년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였으며 세계적으로 20여 년 동안 약 30만여 명이 시험관 아기로 탄생하였다.
 

100. 복제양 돌리 탄생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이안 읠머트 박사와 케이스 켐벨 박사는 성장한 양을 복제시키는데 성공해 그 결과를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 지에 게재했다. 1930년대 독일의 발생학자 스페만이 핵 속에 생명체 형성을 위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 이래 복제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개구리나 소, 양 등을 복제해 왔다. 그러나 윌머트 박사팀의 복제는 발생초기의 수정란을 나누는 기존의 복제와는 달리 다 자란 양의 체세포를 이용한 것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던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성급한 언론들은 누구를 먼저 복제할 것인지에 대한 인기투표까지 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윌머트 박사는 6살된 양의 유방으로부터 얻은 유선 세포를 배양하고 이로부터 핵을 추출한 뒤 미리 핵이 제거된 미수정란에 이식했다. 이때 다 자란 세포에서는 수정란 세포를 발생시키는 유전 정보가 발현되지 않으므로 체세포 핵의 세포분열주기와 핵을 받을 난자의 주기를 맞추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정란은 대리모 자궁에 이식되어 돌리(Dolly)라는 복제양으로 태어났다. 윌머트 박사의 성공 이후 전세계적으로 복제 연구가 붐을 이루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복제소가 탄생하였다. 또한 인간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여벌의 장기를 만들어내어 필요할 때 이식한다는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복제연구는 사회의 거센 반발을 낳았으며 생명공학 전반에 대한 윤리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다.

1. 불의 이용
초기 인류가 이룩한 가장 큰 기술적 변혁으로는 불의 발견과 그것의 광범위한 사용을 들 수 있다. 인류가 초기에 달성한 기술적 성과 중에 직조와 재봉 등은 이미 몇몇 동물들에 의해 선행되고 있었지만 불은 어떠한 동물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또한,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이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킨 것은 인류가 집단적으로 기술의 위력을 경험한 최초의 사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불이 가진 상징적 의미는 전기를 제2의 불이라 하고 원자력을 제3의 불로 칭하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불의 사용으로 인류의 생활과 기술은 급격히 향상될 수 있었다.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화로를 중심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원시 공동사회의 형성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불을 통해 음식물을 익혀 먹음으로써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다양한 음식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고 기생충에 감염될 확률을 줄임으로써 보다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음식물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인류는 가공법을 익히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과학 기술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음식물을 끓이기 위해 점토 용기를 불에 구우면 단단해진다는 경험으로부터 고온 처리 기술이 습득되었고 이것은 이후에 야금 기술과 연결되어 금속 시대를 여는 실마리가 되었던 것이다. 공구가 물리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불은 화학적 과학 기술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2. 바퀴의 발명
바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꼽힌다.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바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000년 경으로서, 탈것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도공(陶工)들이 사용하는 물레에 사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랜 기록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유사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바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퀴는 빠른 속도로 북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처음에 바퀴달린 탈것은 의식(儀式)이나 행사를 위해 사용되었고, 곧 전쟁에 이용되었다. 바퀴달린 탈것이 물건을 나르는 데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최초의 바퀴는 통나무를 원반 모양으로 잘라내어 다듬은 형태이거나 세 개의 널빤지를 서로 결합시켜 원형으로 깎은 형태였다. 이러한 바퀴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부서졌으므로, 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얇은 나무나 구리로 만든 테를 둘러 사용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바퀴살이 달린 바퀴가 처음으로 나타나 이용되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바퀴의 사용이 불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곧 문명의 발전을 의미한다는 식의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운송 수단으로 바퀴를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준 문명권들도 존재했다. 바퀴의 사용은 인류 문명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였다기보다는 특정한 문명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특수한 요소였던 셈이다.
 

3. 그리스 자연 철학의 시작
일반적으로 과학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진다. 자연 현상을 자연적 원인으로 설명하고, 자연을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전통이 고대 그리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학문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동시에 철학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자연 철학'이라고 불린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도시 국가라는 자유로운 정치 체제 아래에서 토론하는 전통이 싹틀 수 있었고, 해상 무역 활동의 혜택으로 비실용적인 지식을 추구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색한 내용은 상당히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과학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이 세상을 만든 근본 물질은 무엇인가?', 또 '그 근본 물질에서 어떻게 다양한 물체와 현상들이 생겨나는가?'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해 탈레스는 물을, 아난시만드로스는 무한자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근본 물질로 제시하였다.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어떤 물질이 다른 어떤 물질로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엠페도클레스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물질이 근본물질이며, 네 가지 근본 물질은 변하지 않고 이것들이 섞여서 여러 가지 다른 물체가 된다고 주장하였고, 데모크리토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원자들이 모여서 갖가지 물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고 더 나은 주장을 만들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면서 학문의 수준을 끌어 올렸다. 그리스 자연 철학의 진정한 과학적 의의는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4. 피타고라스 정리의 발견
고대 그리스 수학의 발전은 피타고라스 학파로부터 시작되었다.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정리를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삼각형이 세 변의 길이의 비가 3 : 4 : 5나 12 : 13 : 5이면 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라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각 삼각형의 정리'를 '피타고라스의 정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 정리를 처음으로 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사상 최초의 '증명'이었다. 즉, 피타고라스는 논리적 증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기술에 가까웠던 산술이나 측량술을 수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사람이고, 그래서 그를 '수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자신이나 그의 제자들은 오늘날의 수학자들과 사뭇 달랐다. 그들은 강한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은 종교적 믿음과 섞여 있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학문은 종교와 수학이 뒤섞여 있는 것이었지만, 자연의 만물에는 자연수로 나타낼 수 있는 조화 또는 비율이 있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남겼다. 이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제일 큰 공헌이었다.
 

5. 금속의 발견
인류가 획득한 여러 가지 기술 중에서도 금속의 사용은 재료의 면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금속은 석기에 비해 가공성이 뛰어나고 외부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금속 중에서도 인류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청동과 철이다. 이것은 인류 시대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나누어진다는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고 철기 시대는 기원전 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이후에 플라스틱이나 세라믹과 같은 신소재가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철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통하여 인류는 처음으로 금속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금속을 생산하려면 독립적인 전문가가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청동기 시대에는 장인 계층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동은 희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에 청동의 용도와 사용자는 매우 국한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철은 매장량이 풍부하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에 매우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이나 장인을 넘어 평범한 농부도 금속으로 된 도구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기 시대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6. 고대 원자론
고대 그리스에서는 근본적 원소의 존재 여부에 대한 토론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가 주창했던 고대의 원자론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온 세계는 아주 작은, 무한히 많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 원자들은 진공 속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 또한 이 원자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러 크기, 모양으로 무한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물질은 구성 원자들이 배열된 모양과 구조,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들이 주장한 원자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를 무수히 나눈 것이기 때문에 원자론은 존재론적으로 파르메니데스의 견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한히 많은 원자들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고대 원자론자들은 비결정론적이고 무신론적인 견해를 표방했다.

고대 원자론은 본질적으로 정량적, 실험적 연구나 수학적인 추리의 산물이 아니라 사색과 직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과학적 이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목적론적인 입장과 신을 배제하고, 우연을 인정치 않으며, 모든 운동을 필연적인 상태로 보는 기계적인 세계관을 채용한 것은 근대 물리학의 방향과 일치한다.
 

7.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고대인의 의학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 '죄에 대한 벌'로 질병을 보는 도덕적 질병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약 460∼375년경)는 질병을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 코스 섬 출신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의 주장과 그를 따른 학자들의 주장은 이른바 <히포크라테스 전집>에 남아 있으며 이 전집은 오랫동안 의학의 최고 경전으로 칭송받았다. 오늘날에도 의료 행위에 대한 히포크라테스의 숭고한 직업정신이 본보기로 통하고 있어 의사의 길을 가는 이들은 꼭 한번은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게 된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의 질병을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 사체액 사이의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사체액을 각각 사계절과, 공기, 물, 불, 흙 사원소와 습하고 건조하며 뜨겁고 찬 네 가지 성질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당시 의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의료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다양한 풍토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였다. 히포크라테스가 인간의 사체액을 자연의 원소와 성질에 연결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히포크라테스가 활동하던 시기의 의사들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 능수능란한 언변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질병을 신들과 연결시켜 대중의 무지와 두려움을 이용하였다. 지금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하는 것은 히포크라테스가 바로 그러한 의사들의 행동을 비판하면서 신분을 초월하여 환자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과 경험적이고 체계적인 의학 연구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8.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학자였다. 그는 문학 이론부터 역사, 정치학, 논리학,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수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더욱이 그는 이 분야들을 하나로 포괄하는 거대한 체계를 만들어 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 철학의 각 분야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그의 우주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우주를 중심에 있는 지구부터 달까지의 지상계와, 달부터 그 위까지의 천상계로 나누었다. 항상 변화하는 지상계는 불완전한 세계여서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 운동만 있는 반면, 영구 불변의 완전한 세계인 천상계에는 오직 등속 원운동만이 있다. 한편 천상계에는 완전한 원소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구들이 있지만, 지상계에는 차가움/따뜻함, 건조함/습함의 4가지 성질이 조합된 흙, 물, 공기, 불의 4원소가 지구의 중심부터 무거운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그는 천상계의 등속 원운동과 지상계의 수직운동을 '자연적 운동'으로, 외부로부터 운동 원인이 작용할 때만 발생하는 운동을 '비자연적 운동'으로 구분하였다. 즉 그의 우주론은 물질 이론임과 동시에 운동 이론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대단히 거대하고 잘 짜여진 체계였다. 이렇게 거대한 체계의 일부를 부정하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다른 이론들까지 문제삼아야 했다. 이렇게 잘 짜여진 체계였다는 점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은 이후 약 2천 년 동안이나 지식인들의 사고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9.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수학책은 단연 유클리드(Euclid, B.C. 259년경 활동)의 <기하학원론>이다. 유클리드가 지은 <기하학 원론>은 천 년 이상 기하학의 고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기술하는 수학으로 그와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법을 사용하지만 정작 뉴턴 자신은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사용하여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였다. 열세 권으로 이루어진 <기하학 원론>은 이전의 여러 사람들, 특히 피타고라스와 에우독소스의 정리를 설명하여 편찬한 고대 기하학의 종합판이다. 기하학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는 왕의 질문에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유클리드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그가 헬레니즘 시대를 살았고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것과 알렉산드리아에서 수학을 가르쳤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 이외에 몇 가지 다른 저술을 남겼다. <자료론>과 <분할에 관하여>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기하학의 오류를 담은 <오류론>, 아폴로니우스가 내용을 덧붙인 <원추곡선론> 등은 후세의 주석에 의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기하학 원론>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단순히 도형들에서 발견되는 여러 법칙을 서술한 것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공준과 공리에서 정(리)의를 이끌어 내고 이를 증명하기까지 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이후 수학적 논증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다.
 

10. 종이의 발견
종이는 흔히 나침반, 화약 등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간주되는 발명품이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종이는 서기 105년에 후한(後漢) 대의 환관이었던 채륜(蔡倫)에 의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250년 이상 일찍 발명되어 기원전 14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종이는 처음에는 뭔가를 기록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포장 재료나 의복, 개인 위생용으로 이용되었다. 기록 용도로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한 증거는 서기 110년경이 되어야 비로소 찾아볼 수 있다.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동을 거쳐 서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제지술은 751년 경 중앙아시아의 슈마르칸트에 전파된 것을 시작으로 바그다드, 카이로, 모로코, 스페인을 차례로 거쳐 서유럽에 퍼졌으며, 14세기에는 서유럽 각지에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중세 서유럽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되었던 양피지는 이후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종이는 15세기 이후 발전한 인쇄술과 함께 지식의 대중화 과정을 주도하여 종교개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1. 프톨레마이오스 알마게스트
알렉산드리아 토박이였던 고대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뮤제온에서 천문학, 점성술, 광학, 지리학 등을 연구하였다. 그의 대표작은 <알마게스트>라는 천문학 책인데, 이는 '가장 위대한 것'이란 뜻으로 훗날에 아랍인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서가 너무나 훌륭하다고 해서 원제목 대신 붙인 이름이다. <알마게스트>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에 바탕을 두고 행성의 움직임을 원운동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전원', '이심원' 등과 같은 복잡한 수학적 도구들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도구들은 행성들이 실제로는 타원 궤도를 따라 운행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던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자들이 행성의 움직임을 규칙적인 원운동으로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것들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틀렸다고 간단히 말하기 쉽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은 지동설과 타원궤도를 몰랐던 헬레니즘 천문학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여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알마게스트>는 원운동을 이용하여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매우 훌륭한 책이었다. 실제로도 이 책에 따라 행성의 운동을 계산한 결과는 매우 정확하였고, 이 때문에 그 후 1,500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는 최고의 천문학자로 존경받았다.
 

12. 나침반의 발명
역사상 중국인에 의해 발명된 최고의 발명품으로 나침반, 종이 그리고 화약이 손꼽힌다. 이들 세 발명품은 거의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나침반은 지자기에 의해 자침이 항상 자기북쪽을 향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항해, 여행 등 먼거리를 이동할 때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도구이다.

자석이 지구의 북쪽을 향하는 성질은 유럽보다 중국에 먼저 알려졌다. 자석의 성질을 기술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인 후한(25∼220)시대 왕충(王充)의 저서 <논형(論衡)>에 의하면 '자석인침(慈石引針)' 외에 '사남(司南)의 국자(杓)'라는 기록이 있다. 천연 자석을 국자 모양으로 만든 것을 '사남의 국자'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테이블 위에 두면 그 머리가 남쪽을 향한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자석은 '마그네시아의 돌'이라는 뜻의 '마그네트'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이미 발견되었으나 그것이 나침반으로서 사용되게 된 것은 중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자석은 특히 14세기 이후 서양의 함선들이 전 지구를 항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이 이후 자석이 없는 항해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배들이 GPS, 즉 위성항법장치를 장착하고는 있으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 여전히 나침반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10. 0의 발견
그리스의 수학이 엄격한 논리적 사고를 북돋우는 기하학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도의 수학은 일찍부터 수의 추상화에 성공하여 복잡한 산술이나 대수를 발달시키고 있었다. 고대에는 인도인들도 그리스나 로마인, 또는 그에 앞선 고대의 이집트 사람들처럼 10진법을 쓰면서도 10, 100, 1000, 10000....등에 각각 다른 부호를 써야 하는 불편한 기수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6세기까지는 이들은 같은 부호를 자리에 따라 다른 값으로 읽을 줄 아는 지혜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0'을 오늘날의 우리처럼 쓸 줄 알게 되었다.

자리에 따라 같은 부호로 다른 숫자를 나타내게 하는 방법은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쓰여졌지만, '0'을 알게 되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도 0을 발견하고 썼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들의 영향은 대서양 저쪽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아시아나 유럽의 구 문명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구대륙에 0의 사용이 퍼진 것은 인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도에서 0을 써서 남긴 기록은 적어도 5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실제로 0이 알려진 것은 그보다 수백 년도 더 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4. 금속활자의 등장
우리 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책을 인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금속활자가 처음 만들어져 사용된 것은 고려 시대 고종 21년(1234) 경이었다. 당시의 학자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후집에서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금상정예문>은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아 어떤 모양의 책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는 역시 고려 시대인 우왕 3년(1377)에 인쇄되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직지심경>이 꼽히는데, 이는 흔히 서양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요한 구텐베르크보다 70년 가량 앞서는 기록이다.

그러나 활자 인쇄술이 사회적으로 더 넓은 영향을 미친 것은 정작 서양에서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지식층의 숫자가 적어 책의 수요도 많지 않았으므로, 활자 인쇄술이 지닌 잠재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없었다. 반면 서양의 알파벳은 활자 인쇄술의 보급에 적절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1450년 평평하게 배열할 수 있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여 수백 권의 책을 인쇄한 구텐베르크가 이러한 가능성을 최초로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15. 콜럼부스의 항해
황금의 나라 인도를 향한 스페인 왕실 소유의 탐사대는 드디어 1492년 10월 12일 벌거벗은 야만인들이 사는 한 해변에 도착하였다. 탐사대의 대장인 콜럼버스(Columbus, 1451∼1506)는 이 땅을 '구원의 성자'란 이름의 '산 살바도르'라고 불렀다. 신대륙에 유럽인의 발자국이 처음으로 찍힌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이 땅을 진짜 인도 대륙이라고 믿었다. 1497년 브라질을 탐험한 아메리고 베스풋치의 항해기로 신대륙이 널리 알려진 뒤 그 이름은 비로소 아메리카가 되었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콜럼버스는 어릴 때부터 항해에 관심을 가져 10대 후반부터 아버지를 도와 지중해와 아이슬란드까지 가는 항해를 하였다. 제노바의 상선대 선장이 된 이후로는 마르코 폴로와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책을 탐독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갖게 되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면 반드시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483년 이 꿈을 포르투갈 왕에게 청원하였으나 거부되었으며, 몇 년 뒤 마침내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원조를 얻어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니냐, 핀타 세 척의 배는 인도로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어진 네 번의 항해도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에게 약속한 엄청난 황금도 찾지 못하고 항해 내내 반란과 문책에 시달렸지만, 황금만큼 전세계 시장을 휩쓴 담배를 처음으로 유럽에 소개하였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을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16. 삼차방정식의 일반 해법 발견
일찍이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x3 + x2 = c 라는 형태의 3차방정식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3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도 3차 방정식을 풀겠다는 노력은 있었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최초로 3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한 것은 16세기 초 무렵 이탈리아의 수학자 페로(S. del Ferro)라고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해법을 공표하지 않고 사위인 피올레에게만 전수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3차 방정식의 해법을 전수받은 피올레는 해법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누구에게나 자랑했다고 한다. 그 소문에 자극을 받은 베니스대학의 교수 타르탈리아(N. Tartaglia)는 3차 방정식에 몰두하여 마침내 그 해법을 혼자 알아냈다. 1535년 피올레와 타르탈리아는 공개석상에서 서로 문제를 풀어 승패를 겨루게 되었는데, 타르탈리아가 피올레의 문제를 2시간 남짓 걸려 풀었는데 반해 피올레는 한 문제도 풀지 못했다고 한다. 타르탈리아의 승리가 널리 세상에 알려지고 명성을 떨치게 되자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해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중 밀라노 대학의 카르다노(G. Cardano)는 타르탈리아가 언어장애자란 약점을 이용해 자기가 저서를 발표할 때까지는 절대로 남에게 공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법을 전수받았다. 몇 해 후인 1541년, 카르다노는 타르탈리아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고등대수학>을 출판하여 3차 방정식의 해법을 공표했다. 이 결과 불쌍하게도 3차 방정식의 해법은 카르다노의 방법이라 하여 인용하게 되었다.
 

17. 코페루니쿠스의 지동설 등장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 활동했던 과학자 코페르니쿠스는 이탈리아에 유학할 때 마침 붐을 이룬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가 단순하며 수학적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철저한 플라톤주의자인 그의 눈에 비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허점 투성이로 보였다. 그는 천동설에 반대해서 자신의 지동설을 주장하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1543년에 출판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 도는 한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 프톨레마이오스도 지구가 돌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만약 지구가 움직인다면 모든 떨어지는 물체에 앞서 갈 것이며, 지구 위의 동물과 물체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에 대해 대기권 안의 모든 것은 지구와 함께 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구와 같은 큰 땅덩어리가 돈다면 원심력 때문에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더 빨리 도는 천체들은 무사할 리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와 같이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운동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졌던 것은 아니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보다 있음직한 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영향은 천문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중세의 우주관과 그것에 바탕을 둔 사고방식은 밑둥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인간은 그 위에 사는 가장 존엄한 존재였는데, 이제 인간은 여러 행성들 가운데서도 비교적 작은 별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가는 존재임이 드러났다. 인간은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야 했으며,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렇게 해서 중세 체제는 차츰 깨어지고 근대로 넘어오게 되었으니, 코페르니쿠스야말로 이 변화의 첫 신호를 울린 사람이었던 것이다.
 

18. 베살리우스의 새로운 해부학
코페르니쿠스가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돈다고 하여 천문학의 혁명을 시작하던 시기에 해부학에서도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Vesalius, 1514∼1564)가 주도한 새로운 흐름이 있었다. 베살리우스는 파리와 이탈리아 파두아 대학에서 공부한 뒤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로 임명된 뒤 당시의 관례인 대리 해부를 거부하고 직접 인체 해부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1543년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란 7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 실린 해부도는 너무나 생생하여 한동안 능가하는 책이 없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도는 사실적인 해부도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새로운 연구 방법은 이후 파두아 대학 해부학 교수들에게 이어져 해부학을 순수한 경험과학으로 정착시켰다.

16세기까지 널리 받아들여지던 갈레노스의 인체이론은 소화, 호흡, 신경 활동을 각각 자연, 생명, 동물의 영혼에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해부학은 이러한 갈레노스의 이론을 검증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는 인체 해부 결과 갈레노스가 말한 허파 좌우심실 사이의 격막 구멍이 없으며 정맥보다 동맥에 더 많은 피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베살리우스는 이러한 발견들은 세밀한 해부도와 교육을 통해 전 유럽으로 전파하였으며, 그 결과 새로운 해부학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이때 인체의 거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학 지식이 축적되었으며, 오늘날 사용하는 용어들이 거의 대부분 정립되었다. 그리고 16세기 후반부터는 인체의 구조에 대한 기술에서 기능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17세기 하아비가 피의 순환 이론을 바탕으로 생리학의 혁명을 가져왔다.
 

19. 그레고리오력의 반포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기존의 달력체계가 갖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달력체계를 선포하였다. 당시에 사용되고 있던 율리우스력은 1태양년을 365.25일로 하고, 4년 마다 하루씩 '윤일'을 넣어 달력과 계절이 일치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측정할 때 생기는 약간의 오차로 인해 100년마다 하루씩 늦어지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밀린 날짜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14일에 달하자, 교황은 당시 3월 11일이었던 춘분을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 시대의 춘분 날짜인 3월 21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1582년 10월 4일을 기점으로 달력의 날짜가 열흘씩 앞당겨져 10월 4일 다음날은 10월 15일이 되었다.

그레고리력이 율리우스력과 다른 점은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 중에서도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가 아니면 윤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로 1600년, 2,000년은 윤년이다. 또한 4,000년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 아니고 평년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어 2만년에 하루 정도 오차가 생길 만큼 정확하다. 개정된 지 1년 만에 그레고리력은 이탈리아의 소국가,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카톨릭을 믿는 독일의 소국가에 전파되었으며, 점차 다른 국가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1699년에는 신교를 믿는 독일의 소국가들, 1752년에는 영국과 그 식민지, 1753년에는 스웨덴, 1873년에는 일본, 1912년에는 중국, 1918년에는 소련, 그리고 1923년에는 그리스가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20. 현미경의 발견
너무 작거나 멀리 있어서 맨 눈으로 분석할 수 없는 물체를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사용하여 확대해서 본다는 착상은 과학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작은 물체를 확대하는 기능을 가진 현미경은 1590년에 네델란드의 젠센에 의해 최초로 발명되었고, 현미경의 초점 조절 장치는 1668년 이탈리아의 캄피니가 개발하였다. 1660년 네덜란드의 과학자 뢰벤후크는 최초로 현미경을 사용하여 박테리아를 관찰하였는데, 그가 만든 270배율의 현미경은 미생물과 인간의 혈구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었다. 현대의 광학 현미경은 배율이 수 천 배에 이르는데, 이 정도의 배율을 얻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렌즈를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효율적인 광학 현미경의 설계는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전자 현미경이다. 전자 현미경은 100만 분의 1밀리미터 정도의 물체를 전자의 파동성을 이용하여 관찰하는 장치이다. 전자 현미경에는 주사 전자 현미경과 투과 전자 현미경이 있다. 전자 현미경은 생물학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으며, 암석의 연구, 재료 과학, 반도체 제조 등에 요긴하게 사용된다. 전자 현미경은 1926년 한스 부쉬가 설계했다. 부쉬의 발명은 1873년 에른스트 아베의 이론적 업적과, 이를 이은 베를린 공대의 에른스트 루스카와 막스 크놀의 노력에 기반을 두었다. 그들은 1933년에 전자 현미경을 최초로 실용화시켰다.
 

21. 길버트, <자석에 대하여>
16세기 말 런던의 유명한 의사이며 후에 궁정의가 되기도 했던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가 1600년에 출판한 책 <자석에 대하여>는 근대 자기학과 전기학을 태동시킨 저작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자석에 대하여>는 자기 현상에 관한 기본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모아 놓은 체계적인 논의였고, 이 주제에 관한 이처럼 방대한 저술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 물론 이 책에 담긴 자료들 중에는 이전부터 알려져 있던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들 가운데서 사실을 가려내서 실었고, 또 실험을 통해 수집하고 확인한 사실들을 싣는 등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논의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당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던 르네상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책이기도 했다. 길버트에게 자기 현상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힘들로 가득찬 우주의 가장 중요한 활동적 원리였으며, 그런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열쇠였다. 한편 이 책은 전기 현상에 관한 상당량의 탐구 결과를 담고 있는 최초의 책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길버트는 그동안 흔히 혼동되어 오던 자기 현상과 정전기 현상을 분명히 구분했고, 정전기를 일으킬 수 있는 몇몇 도체들에 관해 기술하기도 했다.
 

22. 천체망원경 제작
1609년 갈릴레이는 먼 데 있는 물체를 확대하여 보는 '망원경'이라는 것이 네델란드의 미델부르크의 안경 기술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한스 리퍼셰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 전해에 '망원경'의 발명특허권을 얻었다. 갈릴레이는 렌즈를 여러 가지로 조합하여 광학적 성질을 연구하고 손수 몇갠가의 개량된 망원경을 만들었으며 그것으로 하늘을 살펴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견했다. 그는 망원경 관찰을 통해 천체가 전통적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구보다 완전하거나 뛰어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태양 표면에는 반점들이 있고, 높은 산이 있는 달은 지구와 비슷했다. 그는 달 속의 산 그림자의 길이로 그 높이를 추산했다. 그리고 달이 초생달에서 만월로 모양이 바뀌듯이 금성도 그 모양이 변하고 있다는 것과 목성에는 네 개의 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따르는 태양계를 소규모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16세기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까닭은 코페르니쿠스 학설이 행성의 위치에 관해 톨레미 체계보다도 정확한 예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전통적 역학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이 점차 진보하면서 코페르니쿠스 학설도 점점 힘을 얻게 되었고, 갈릴레이의 여러 발견이 그 타당성을 증명해주었다.
 

23. 케플러의 1,2 법칙 발견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 혁명은 케플러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의 조수로 일했던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은 후 스승의 정밀한 관측 자료를 몽땅 물려받았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몇 개의 원운동만으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리 애써 봐도 8분의 오차를 없앨 수가 없었다. 이 8분의 오차를 없애기 위해 케플러는 '천체는 원운동한다'는 그때까지의 믿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원운동이 가장 완전하고 자연스러운 운동으로서 천상계의 천체는 원운동 이외의 다른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케플러는 이 신념을 포기하고 타원궤도를 새로이 도입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행성은 이제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도는 것으로 제시되었다(케플러의 제1법칙). 또한 행성이 타원 궤도를 도는 속도도 균일한 것이 아니라 태양에서 멀때는 천천히, 가까울 때에는 빨리 도는 것으로 설정하였다(케플러의 제2법칙). 그럼으로써 이제는 더 이상 주전원과 같은 복잡한 기하학적 모델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행성의 궤도는 부등속 타원 운동이라는 단순한 기하학적 모델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케플러의 업적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것은 부등속 타원 운동에 대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케플러는 이 문제에 대해 태양에서 방출되는 자기적 힘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지만, 이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뉴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24. 하비의 혈액순환이론
고대이래 서양에서는 로마 황제의 시의이자 의학자였던 갈레노스의 인체구조 및 작용에 관한 이론이 정설로 통용되어왔다. 갈레노스는 인체의 세 가지 중요기능--소화, 호흡, 신경--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여기에는 사람이 섭취한 음식물은 위와 장을 거쳐 간에 이르러 '자연의 영(natural spirit)', 즉 피로 바뀌어서 정맥을 통해 온몸으로 전달되고 영양분으로 소모된다는 설명이 소화에 대한 이론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부터 활발하게 행해진 인체 해부를 통해 갈레노스가 주장한 해부학적 지식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의학자 하비(William Harvey, 1578-1657)는 갈레노스 이론을 부정하고 피가 온몸을 순환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하비는 맥박이 뛸 때마다 방출되는 피의 양과 맥박의 횟수로부터 적어도 하루에 300Kg 이상의 피가 방출된다고 계산해 내고, 사람의 체중의 몇 배가 되는 이 많은 양의 피가 매일 생성되고 소모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실험적인 증거를 통해 그는 피가 심장에서 나와 동맥을 지나 온몸을 돌고 정맥을 타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온다는 주장을 펼쳤다. 비록 하비는 갈레노스처럼 인체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체계를 세우지 못했지만, 혈액 순환이론이 등장하면서 인체에 대한 생리학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5.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과학 철학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던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은 교육제도의 개혁에 관심이 많았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가 지은 저술 가운데 <학문의 진보>와 <과학의 신기관(Novum organum)>에는 17세기 초의 유럽 학문을 혁신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신감에 충만한 그의 기독교적 학문 혁신론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있었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자연 외적인, 즉 인간의 목적이나 관심이 과학에 들어오자 인간위주가 된 과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고 역설했다. 중세로 접어들어 여기에 종교까지 섞여 들어서 과학적 지식과 경쟁을 하게, 과학은 베이컨 자신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타락해 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근대과학이 창조되는 과정에서 베이컨의 학문 혁신론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학문 혁신론이 탄생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는 그는 거의 깨닫지를 못했었다. 베이컨 이후 17세기 전체에 걸쳐 과학 사상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업적에 지배되고 있다고 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그의 체계적 의심의 방법(method of systemaitc doubt)을 통해 인간의 지식을 한 가지 한 가지씩 부정해 나갔다. 그는 우선 감각에 의한 인간의 경험은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의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부정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이 아는 어떤 외부의 존재도 의심하고 부정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의 존재와 그 완전성을 증명했고, 그에 바탕해서 다시 외부세계의 존재 및 여러 현상들에 관한 지식을 증명해 나가고 결국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에 대한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이러한 지식체계에 바탕을 둔 것이 바로 '기계적 철학(mechanical philosophy)'이다. 이같은 데카르트의 지식체계는 아주 널리 받아졌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영향을 미쳤다.
 

26. 갈릴레이, <두 개의 우주체계에 대한 대화>출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33년에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 즉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해 금지령을 내린 상황에서 갈릴레이가 <두개의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판하고 지동설을 옹호함으로써 금지령을 어긴 것이 죄목이었다.

이 책은 3명의 가상 인물이 코페르니쿠스 우주체계와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우주체계, 즉 천동설에 관해 나누는 대화 형식이었다. 갈릴레이는 드러내놓고 지동설이 옳다고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천동설을 반박하고 지동설을 지지하는 새로운 역학 개념과 망원경을 통해 관측한 결과들, 예를 들어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 변화 등을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지동설로 기울어지도록 유도했다. 특히 이 책은 전 유럽에 빠른 속도로 퍼져 천문학자가 아닌 수많은 지식인들의 우주관에 영향을 주었다. 만일 지동설이 옳다면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므로 인간의 지위,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 운동을 설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역학, 움직이고 있는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운동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나 케플러와 달리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모색한 최초의 과학자라고 할 수 있다.
 

27. 수은온도계의 등장
온도라고 하는 것은 보통 우리가 덥거나 춥다고 느끼는 감각을 결정한다. 온도가 다른 두 물체가 접촉했을 때 고온의 물체는 시원하다고 느끼고, 저온의 물체는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두 물체가 같은 온도에 도달했을 때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했다고 한다.

최초의 온도 측정 장치는 써모스코프였다. 이것은 긴 튜브가 색깔 있는 물에 담겨 있고 그 끝은 유리구 형태로 되어 있다. 갈릴레오는 이 색깔 있는 물이 포도주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641년에는 공기 대신에 액체를 사용한 온도계로 발전되었다. 이 때에는 알콜이 사용되었다. 1664년에는 알콜 대신에 빨간색 염료가 사용되었다. 1702년에는 두 개의 고정점이 눈금의 기초가 되었는데 눈과 물의 끓는점이었다. 이 온도계로 1708-1709년에 코펜하겐의 날마다의 온도를 기록했다. 온도계의 액체로 수은이 사용된 것은 1724년이었다. 수은의 열역학적 팽창은 크고 균일하다. 수은은 영하 38.9℃에서 356.7℃ 까지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 액체인 수은은 뜨거워질수록 부피가 팽창하는데 이 팽창률이 일정해서 정확하게 눈금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한 수은은 유리에 붙지 않고 넓은 온도 범위에서 액체 상태를 유지한다는 특성이 있다. 또 색깔이 읽기에도 좋다.
 

128. 토리첼리의 대기압 실험
7세기에 들어와 서양에서는 공기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토리첼리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의 존재한다는 사실과 대기압의 위력을 다음과 같이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한쪽이 막힌 길고 두꺼운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운 다음, 한 쪽을 손가락으로 막아 수은이 담겨진 그릇에 세우고 손가락을 떼었을 때 유리관 속의 수은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내려가지 않고 멈추었다. 이때 유리관 안에 남아있는 수은의 높이는 76센티미터였다.

이 실험에서 두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첫째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토리첼리의 진공"은 인류가 만든 최초의 진공이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라는 명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에는 진공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실험결과 수은주의 상단에 진공이 형성됨으로써 오랫동안 고수되던 권위가 사라졌다. 이것은 곧 실험과학의 승리를 의미한다. 둘째, 수은주가 일정한 점에서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대기압의 작용 때문인데, 그 대기압은 수은주 76센티미터를 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9. 파스칼의 원리 정립
유체정력학의 확립에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파스칼의 원리는 1652년 무렵에 프랑스의 수학자·물리학자이자 종교가인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에 의해 처음으로 분명하게 정립되었다. 그것을 쉽게 풀어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용기 속에 있는 유체의 어느 한 부분에 가해진 압력은 그 유체의 모든 부분과 용기의 안쪽 벽에 똑같은 크기로 전달된다."

이 원리가 가지는 과학사상의 의의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이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던 진공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17세기 유럽의 과학계에서는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자연철학에 대해 기계적 철학이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었으며, 그 가장 첨예한 대립 지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진공에 관한 문제였다. 사이펀이나 펌프가 일정한 높이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계적 철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고, 토리첼리의 수은기압계 실험 등이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원리를 고수하려는 기존의 자연철학의 궁색한 설명들의 타당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파스칼의 일련의 기발한 실험들, 즉 물과 포도주의 비교실험, 머리부분의 모양이 서로 다른 유리기둥들을 사용한 비교 실험, 퓌 드 돔 실험, 진공 속의 진공 실험 등이 제시되면서 유체의 압력(당시에는 아직 '무게'라고만 생각했지만) 전달 현상에 관한 기계론적인 설명이 부인할 수 없는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30. 미적분법의 발견
미분학은 곡선의 접선을 긋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적분법은 곡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의 면적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법 자체는 그리스 시대부터 논해져 왔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미적분법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은 1665년 대학으로부터 집으로 귀향하던 중에 그의 유명한 삼대 발견, 즉 빛의 분산, 만유인력의 존재, 미적분학을 이루어 냈다. 1687년에는 그의 역학 체계를 나타내는 대저 프린키피아를 출간하였다. 뉴턴 역학의 기초를 이루는 운동의 3대 법칙이 이 프린키피아에 기술되어 있는데, 1704년에는 3차곡선론, 곡선의 구적법을 발표하여 미적분법의 정식 설명을 공표하였다. 미적분학에 관한 계산법에 관해서는 라이프니츠와의 사이에 그 선취권에 관한 논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발표는 라이프니츠 쪽에서 앞섰지만 실은 이미 그 10년 전에 뉴턴이 발견, 연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와서 밝혀지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1675년에 새로운 계산법, 즉 미적분법을 발견하였고, 이 결과를 1677년에 발표했다. 1686년에 발표한 〈심오한 기하학 및 무한소 분석에 관하여〉 라는 논문에서 라이프니츠는 많은 초등 함수들의 적분에 관한 법칙을 실었고 적분 부호를 이용했을 뿐 아니라 미분과 적분을 서로에 대한 역연산이라는 사실까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부정적분을 정적분과 분리하여 적분상수도 생각하고 있었다. 1693년에 그는 초월함수를 급수로 전개하여 여러 가지 결과를 얻기도 했으며, 1695년에는 함수의 적을 n회 미분할 때 쓰이는 공식을 발표하였다. 여러 가지의 용어를 도입한 것도 그의 공적이다. 미분, 함수, 좌표, 미분방정식, 산법 등과 같은 용어는 그가 최초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계산법은 1696년에 로피탈(l'Hospital, 1661-1704)이 처음으로 저작의 모양으로 만들어 〈무한소분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31. 세포의 발견
코르크는 원형질이 없이 속이 빈 세포가 규칙적으로 배열해있는 것으로, 부피생장하는 식물의 줄기, 가지, 뿌리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보호조직이다. 영국의 로버트 훅(Robert Hooke, 1635-1703)은 당시에 개발되어 사용되기 시작하던 현미경을 이용하여 코르크를 관찰한 후, 이를 '작은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를 빌어 '세포(cell)'이라고 이름지었다. 1665년 그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대상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그 구조를 상세하게 기술한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아 그가 관찰한 것은 세포 자체가 아니라 세포벽이었다. 또 당시 현미경의 성능상 한계로 더 자세한 세포 구조를 관찰하기 어려웠고 훅은 세포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800년대에 슐라이덴(Mathias-Jacob Schleiden, 1804-1881)이 식물세포설을 주장하고, 이어서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이 동물계까지 세포설을 확장시킨 후에야 비로소 생물의 구조적/기능적 기본단위로서의 세포의 중요성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세포설의 등장으로 생물학은 발생학, 유전학 및 진화론에서 근대적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
 

32. 뉴턴 고전역학의 성립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과학자라 할 수 있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정립한 역학 체계는 아인슈타인이 나오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인류의 시공 개념을 장악했다. 흔히 고전역학이라고 불리는 이 역학 체계는 뉴턴의 힘에 관한 세 가지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통해 케플러가 제시한 행성의 타원 궤도 운동을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만유인력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역학 체계는 1687년에 출간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체계적으로 소개되었는데, 이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함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책이다.

16-17세기에 진행된 과학의 혁명적인 변화를 흔히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뉴턴의 혁명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문학의 문제들을 역학적으로 완전히 설명하고, 갈릴레오에서부터 비롯된 역학의 혁명을 완결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뉴턴의 역학은 이후 호이겐스, 라플라스 등에 의해 더욱 정교화되었고, 이후 모든 물리 과학(physical science)의 기본이 되었다. 나아가 고전역학은 특정한 초기 조건과 물체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방정식이 있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이러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와 양자역학이 성립되면서 상당히 퇴색되었지만,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33. 증기기관의 탄생
18세기 증기기관의 등장은 사람이나 가축, 흐르는 물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증기의 힘을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고대에도 알려져 있었고 기원 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증기의 힘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을 실제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증기의 힘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17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났다. 1698년에 영국의 토마스 세이버리는 증기를 응축시켜서 얻은 흡입력으로 광산의 물을 뽑아올리는 수동 밸브 펌프를 만들어 최초로 특허를 받았고, 1712년에 토마스 뉴커맨은 피스톤과 실린더를 이용해 작동하는 최초의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산업혁명기에 증기기관이 널리 전파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제임스 와트이다. 1765년 그는 뉴커맨 기관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분리 응축기를 도입하여 연료의 소비량을 뉴커맨 기관의 1/4 정도로 줄이는 중요한 기술적 진전을 이루어내었다. 또한 와트는 이전까지 왕복운동만 가능하던 증기기관이 회전운동도 할 수 있도록 개량함으로써 증기기관이 물 펌프 용도만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동력으로도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공장들은 수력을 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강가에 자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운송 채널이 다양하고 노동력이 풍부한 도시 근처에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산업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4. 린네의 생물의 분류체계확립
1707년 스웨덴의 읍살라에서 태어난 린네(Linneaus, Carl, 1707-1778)는 18세기를 대표하는 탁월한 식물학자이다. 흔히 '분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명법을 분류학에 적용한 학자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생물계를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식물의 성에 관심을 두고 꽃의 구조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린네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식물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수술의 수에 따라 식물계를 24개의 강으로 구분하고, 이명법을 사용하여 식물의 이름을 종과 속으로 나타내었다.

1737년 린네는 <자연의 체계>라는 책에서 분류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종래의 방법보다 식물을 나누는 데 매우 편리하였기 때문에 발표되자마자 많은 학자들의 호응을 얻으며 유럽 전역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그의 3대 저서중 하나인 1737년 <식물의 속>과 1753년 2권으로 된 <식물의 종>을 연속적으로 발간하여 분류학의 계통을 확립하였다. 린네의 분류법은 정적인 분류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생물의 질적인 변화, 즉 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기계적 자연관이 풍미하던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으로 꼽힌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식물의 분류 방법은 더욱 다이나믹한 사고에 의해 진전되어 상호 발생과 관련성을 중시하는 자연 분류체계의 발달로 이어진다.
 

35. 아크라이트 방적기의 등장
영국의 기술자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수력 방적기의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영국의 섬유산업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크라이트가 1769년에 특허를 얻은 기계는 종래에 이미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던 롤러드래프트 장치와 플라이어가 붙은 방차의 꼬기, 감기, 기구를 멋드러지게 결합한 것이었다. 이 방적기는 보통 수차로 작동했기 때문에 수력 방적기라 불렸다. 그의 방적기는 날실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공정을 연속화했을 뿐 아니라, 숙련공을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인력 이외의 동력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방적 산업에서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후 그는 방적 공정과 그에 관련되는 여러 가지 기계를 유기적으로 결합, 배치하여, 이런 기계들이 공통의 동력으로 구동되는 생산 체계를 고안해내었다. 그는 이런 체계에 기반하여 대규모 방적 공장을 각지에 설립하고, 이것을 직접 경영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산업혁명기의 대표적 기업가로 손꼽힌다.

한편 그의 독점에 반대하는 면업 경영자들이 그의 특허에 소송을 벌여, 그의 특허는 85년에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착상이 비록 남의 것이었다고 판정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용화할 수 있는 기계로 발전시켜 근대적 공장제도를 창시하고 성공적인 경영관리 등을 이룩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86년에 그는 기사 칭호를 받았고, 87년에는 더비셔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36. 라부아지에와 화학혁명
18세기 무렵 화학은 다소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로 영국의 화학자들을 중심으로 대기로부터 이산화탄소, 이산화질소, 산소 등의 성분기체들이 분리되고 그 성질들이 다양하게 연구되는 등 경험적 자료의 축적 면에서 상당한 성과들이 있었던 반면, 그런 자료들을 포함한 많은 화학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는 여전히 플로지스톤 이론이 동원되고 있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에서 말하는 플로지스톤은 어떤 때는 '비물질적 작인'으로 설명되다가 또 다른 경우에는 '물질'인 것처럼 제시되기도 하는 등 모호한 면이 있었고, 특히 금속을 태우는 실험에서는 결정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에 의해 상당 부분 바뀌었다. 그는 연소, 하소, 호흡 현상을 플로지스톤이 아닌 산소의 출입으로 설명하여 정량적인 실험 결과를 뒷받침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량적, 체계적인 실험과 일반화라는 태도를 화학에 뿌리내리려 했다. 나아가 원소와 화합물 사이의 구분, 더 기본적으로는 물질의 개념을 명확히 하려 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화학명명법 체계의 수립을 시도했다. 1789년에는 이런 성과를 담은 화학분야 최초의 교과서와 전문학술지도 나왔다. 흔히 '화학혁명'이라 부르는 18세기 후반의 이런 다소 급격한 변화과정을 거쳐 화학은 하나의 독자적인 전문과학분야로 자리잡아 갔다.
 

37. 연소 원리 규명
1772년 라부아지에는 연소에 관한 최초의 실험을 하였다. 이는 화학 혁명을 향한 극적인 첫 발이자 라부아지에에 의한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론의 폐기라는 의미를 갖는다. 18세기 내내 화학 전반을 설명해 주는 이론 체계였던 플로지스톤 이론은 16세기 의화학을 창시한 파라켈수스가 제창한 것으로, 1700년경 독일의 화학자 슈탈(Georg Ernst Stahl)이 체계화하였다. 플로지스톤은 모든 가연성 물질에 포함되어 있고 불에 탈 때 연기와 불꽃으로 빠져 나간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금속은 불에 탈 때 산화하여 오히려 무게가 늘어나는데, 이는 플로지스톤 이론의 반박증거가 됨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1772년 유황, 인 등의 화합물로 실험한 다음, '연소 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은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에 타는 물체가 공기를 흡수하고 또 공기를 필요로 한다'는 가설을 발표하였다. 1774년 '플로지스톤이 제거된 공기'의 독특한 성질을 인식한 영국의 기체 화학자 프리스틀리의 연구 등에 힘입어, 라부아지에는 '공기의 가장 활력있고 가장 순수한 요소'를 산소로 정의하였으며 계속되는 연구에 의해 물의 전기분해를 밝히고 공기 중의 연소 이론을 완결지었다. 이는 화학 반응에서 산소가 갖는 역할을 최초로 발견해 낸 것으로, 화학이 연금술에서 탈피하여 근대 과학의 한 분야로 정착되면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38. 갈바니의 동물 전기 발견
18세기는 라이든 병이 발명되고, 천둥이 전기방전 현상으로 설명되는 등 전기현상에 관한 초기의 연구들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 점은 생리학이나 해부학 같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생체에 미치는 전기의 영향, 특히 전기충격이나 전기뱀장어의 충격과 같이 생체가 나타내는 전기현상에 많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1791년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갈바니(Luigi A. Galvani, 1737-1798)는 실험실에서 개구리의 다리를 절개하다가, 개구리 다리의 근육신경조직을 두 가지 다른 금속 조각들에 접촉시켜 놓으면 개구리의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당시에 전기 현상에 관심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전류 현상에 대한 착상을 하게 하여 전기에 관한 연구의 방향을 크게 돌리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해부학자였던 갈바니 자신은 이것을 동물전기 현상의 한 가지이며, 전기뱀장어처럼 개구리의 다리가 전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실험기술은 동물의 신경자극 같은 복잡한 현상의 전기화학적인 성질을 밝히기에는 아직은 너무나 무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9. 쿨롱의 법칙 발견
뉴턴은 물체 사이에는 항상 인력이 작용하며, 그 크기는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후 과학자들은 화학결합이나 전기적 힘에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것을 찾아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한 노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실이 바로 쿨롱의 법칙이다.

원래 프랑스의 토목공학자였던 쿨롱(Charles Augustin de Coulomb, 1736-1806)은 전기를 띤 물체들 사이에 중력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전기력이 존재함을 보이고, 그에 바탕해서 전기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이것은 전기력에 대한 구체적인 수학적 법칙을 제시한 것에 머물지 않고 18세기에 널리 유행한 뉴턴주의(Newtonianism)를 더욱 강화하였다. 쿨롱의 법칙 자체는 이후 맥스웰 방정식의 한 가지로 수학적으로 더욱 정교화 되었고, 이는 전자기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이 법칙은 여러 전기 법칙을 이끌어 내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오늘날 전하의 양을 표시하는 단위로 쿨롱(C)을 사용하는데, 이는 전기력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쿨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40. 지층의 원리 정립
17세기 아일랜드의 한 성직자는 구약성서에 나온 여러 사건의 경과 시간을 계산하여 아예 지구의 탄생 시점을 기원전 4004년 10월 26일 오전 9시라고 못박았다. 퀴비에(Cuvier)같은 생물학자도 대홍수로 전체 생물종이 바뀌었다고도 하였다. 교회의 논리가 과학에 적용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스코틀랜드 출신 허튼(Hutton, 1726∼1797)은 1795년 <지구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지구의 지형을 조사한 결과 지구 표면의 구조가 서서히 단계적으로 변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썼다. 허튼의 주장은, 성경에 바탕하여 대홍수와 같은 급격한 지구활동으로 짧은 시기에 지구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기존의 수성론(nepunism), 또는 격변론(catastrophism)에 반대되는 화성론(vulcanism), 균일론(uniformitarianism)으로 불리었다.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라이엘(Lyell, 1797∼1875)은 유럽과 북미에서 행한 지질 조사를 근거로 허튼의 주장을 더욱 확고히 했다. 라이엘은 지상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자연 현상은 과거와 같은 속도, 같은 양식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작용이 누적되어 큰 결과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지층 층위론(stratigraphy)의 창시자로도 불리는 라이엘은 지층 분석을 통해 지표에 가까울수록 현재와 유사한 생물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여 지층에 따른 시대 구분을 하였다. 그 결과 지구의 나이가 적어도 수십억 년이어야 함을 보였다.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비글호 항해 중 라이엘의 책을 읽고 지구의 나이가 그토록 길다면 진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허튼과 라이엘의 연구는 지질학의 발전 뿐 아니라 진화론의 탄생에도 결정적이었다.
 

41. 종두법 시행
천연두는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얼굴에 천연두 감염의 영구적인 흔적인 곰보자국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일찍부터 한 번 천연두에 걸린 사람은 다시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국, 인도, 중동에서는 천연두 환자의 딱지를 코로 들이쉬거나 부스럼에서 나온 고름을 미감염된 사람의 팔에 낸 상처에 대는 방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했는데 이를 인두접종(人痘接種)이라 한다. 인두접종은 1717년 터키 주재 영국 대사의 아내가 영국에 처음 도입하여 서구의 천연두 사망률을 크게 낮추었으나, 인두접종에 의해 오히려 천연두에 걸리거나 전염될 위험부담이 있었다.

안전한 천연두 예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영국의 의사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였다. 그는 자신의 환자 중에 우두에 감염된 소에게 전염된 후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 사례가 있음을 발견하고, 관찰 끝에 우두가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96년 우두에 걸린 소의 부스럼에서 약간의 액을 채취하여 건강한 소년에게 옮겨 천연두를 예방하는데 성공했다. 이 소년은 인간의 천연두를 사용하지 않고 천연두에 대한 예방접종을 받은 첫 번째 사례가 되었고, 우두접종은 인두접종보다 높은 안전성과 예방효과를 나타냈다. 제너의 백신 덕분에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가 지구상에서 마침내 근절되었다고 발표했다.
 

42. 볼타전지의 발명
18세기는 초기의 전기현상 연구에서 많은 발견과 발명이 이어진 시기였다. 1745년에 무셴브뢰크가 라이든 병을 발명함으로써 정전기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18세기 중엽 프랭클린이 천둥을 전기방전현상으로 설명하였으며, 1780년대에는 쿨롱에 의해 쿨롱의 법칙이 증명되었다. 18세기 말 경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에 의해 처음으로 전지가 만들어짐으로써 전기현상에 대한 연구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파비아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볼타는 갈바니가 실험·보고한 개구리 다리의 전기 현상을 갈바니와는 달리 물리적 전기 현상으로 파악했다. 그는 개구리의 다리는 종류가 다른 두 가지 금속의 접합에 의해 발생하는 전기의 민감한 검출기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종류의 금속을 조합하여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금속의 종류에 따라 전기현상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확인했다. 이어 1799년에 금속 쌍을 산성 용액에 담그고, 잠기지 않은 두 끝을 연결하면 회로가 생겨 전기가 계속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 원리를 이용해 최초의 화학전지를 발명했다.

볼타가 만든 '전지'는 단발적인 전기 방전을 만드는 데 그치던 당시의 라이든 병과는 달리 전기가 계속적으로 흐르게 하는 장치였다. 그것은 당시 조금씩 생기고 있던 '전류'라는 개념으로 성큼 다가선 것이었다. 전지의 발명에 힘입어 19세기에는 전기에 관한 획기적인 과학적, 기술적 성과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43. 기체팽창법칙 발견
기체의 성질에 관한 연구는 근대 과학이 탄생한 이래 과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탐구되어 왔다. 그 결과 기체의 압력, 온도, 부피 사이의 관계가 각각 보일, 샤를에 의해 발견되어 그들의 이름을 따라 보일의 법칙, 샤를의 법칙이라 불리게 되었다. 보일의 법칙이란 일정한 온도에서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라는 것이고 샤를의 법칙이란 일정한 압력 하에서 기체의 부피는 온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기체에 대한 연구는 그 후로도 계속 진행되어 왔지만 기체의 상태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기체 분자 운동론이 발달하면서부터이다. 이 이론은 기체를 분자나 입자의 형태로 단순화시켜 기술하는 이론으로서 볼츠만과 맥스웰이 그 기초를 쌓았다. 이에 따른 기체 운동 모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체는 무질서하게 운동하는 많은 동일한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자들은 분자의 크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둘째, 분자 상호간의 충돌이나 용기 벽과의 충돌은 에너지 결손이 없는 완전탄성충돌일 뿐이고 분자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셋째, 분자간의 운동 에너지의 변환된 형태가 열이다. 이런 단순화된 가설을 이용함으로서 앞의 두 가지 기체 법칙들을 수학적으로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
 

44. 기차의 등장
철도의 기원은 광산업에서 찾을 수 있는데 처음에 철도는 탄광 내부에서 사용되다가 점차 탄전 지방과 공업 지역을 잇는 운송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의 많은 기술자들은 매끄러운 레일과 차륜을 직접 접촉시켜 그 마찰로 기차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1804년 트레비틱(Richard Trevithick)은 시속 4마일의 증기기관차를 세계 최초로 제작하였다. 증기 기관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티븐슨(George Stevenson)은 1814년에 상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시속 12마일의 증기 기관차를 개발하였다. 세계 최초의 철도라 할 수 있는 리버풀-멘체스터 철도는 1830년에 개통되었는데 스티븐슨이 개량한 로켓(Rocket)호가 시속 14마일로 달림으로써 철도에 대한 붐을 일으켰다.

1850년대와 1860년대를 거치는 동안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철도를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마차와 운하는 기차에게 지배적인 운송 수단의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철도의 발달을 계기로 국내 시장의 단일화가 이루어져 지방 경제는 국민 경제의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또한, 철도 건설은 금속, 연료, 기계 등을 대량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산업 부문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철도 건설과 운영에는 엄청난 자본과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철도를 매개로 근대적 대기업이 형성되었다. 철도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표준화 작업도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궤간의 크기가 4피트 8.5인치로 통일되었고 전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표준 시각이 정해졌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19세기는 철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5. 돌턴의 원자설 등장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은 아득한 고대부터 존재했다. 돌턴은 오랫동안 기체의 여러 가지 성질을 연구하던 중, 여러 가지 기체의 물에 대한 용해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각종 기체들이 무수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모든 기체는 각기 고유한 작은 입자들로 되어 있어서 이 입자의 크기에 따라 물에 대한 용해도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단서가 되어 그의 최대의 공적인 원자설이 탄생하게 되었다.
돌턴은 1803년 원자설의 대체적인 구상을 끝내고 1808년에 원자설을 세상에 공포했다. 돌턴은 모든 원소의 원자는 공과 같이 둥근 모양이라고 상상하고 이것들의 모형을 만들어 화합물의 구조를 원자 개념으로 모형적으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돌턴의 원자설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원자설과 거의 비슷하지만, 원자의 질량을 특히 강조한 것은 돌턴의 학설의 특이한 장점이다. 돌턴은 수소 원자를 표준으로 하고, 그 원자량을 1로 정한 다음 다른 원자의 원자량을 결정하려고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틀린 부분도 많지만 그 당시의 정량 분석 방법이 아직도 유치했고 돌턴의 실험 기술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돌턴의 원자량의 결함은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화합물의 식을 가장 간단한 식으로 표시하려는데 있는 것인데, 여기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고 합리적인 기초도 없었다. 그러나 화학 변화가 일어날 때 여기에 관여하는 물질의 무게 변화에 규칙적인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원자설에 의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돌턴의 원자설의 하나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46. 아보가드로 가설
돌턴의 원자설, 즉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설과 게이 뤼삭의 기체 반응 법칙을 동시에 모두 성립시키는데는 아보가드로의 분자설이 필요하다. 1811년 아보가드로는 "같은 부피 속에 들어있는 기체의 분자 수는 기체의 종류에 관계없이 모두 같다"는 분자설을 발표했다. 게이 뤼삭이 기체 반응의 법칙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한 산화 질소 반응을 돌턴의 원자설과 결합시켜 합리적으로 이 두 가설을 성립시키려면 필연적으로 아보가드로의 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이 아보가드로의 법칙이 곧 학계에서 채택이 되었던들, 그 후에 원자량의 혼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법칙은 1858년에 그의 제자인 칸니자로에 의해 인정될 때까지 약 50여 년을 암흑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파묻혀 있었고, 자신의 학설이 세상에서 인정되어 빛을 보기 몇 해 전에 아보가드로는 80세의 긴 일생의 막을 내렸다.

당시에 이 법칙은 아보가드로의 가설이라고 불렸다. 이 가설은 현대 화학의 이론 체계를 세우는 근본을 확고히 하였다고 할만큼 중요한 것이었고 돌턴의 원자설의 결함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1860년 칼스루에에서 열린 만국 화학 회의에서 화학 기호의 통일 문제를 협의하였을 때, 아보가드로의 제자인 칸니자로가 그의 업적을 소개하여 비로소 아보가드로의 위대함이 인정받았다. 그의 가설은 오늘날 아보가드로의 '법칙'이라 바꾸어 일컬어지고 있다.
 

47. 뵐러의 요소유기합성 성공
19세기가 시작될 무렵의 유럽에서는 무기화학은 광물분석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전해 있었던 데 비해, 유기화학분야는 상대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 주된 걸림돌 중의 하나는 생기론의 영향이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유기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유기체에만 있는 이른바 '생명력'의 작용이 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유기물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몸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을 뿐 무기물로부터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특별한 현상인 생명과 관계되는 유기물은 무기화학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본적인 화학법칙에 반드시 따르지는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유기물질에 대한 화학적인 접근을 크게 위축시키고 있던 이런 생각들은 1820년대에 독일의 화학자 뵐러(Friedrich Wöhler, 1800-1882)가 무기물인 시안산과 암모니아로부터 대표적인 유기물인 요소를 합성해냄으로써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뵐러 당시의 실정으로는 시안산의 염류는 동물의 뿔이나 혈액 등으로부터 만들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생명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기론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은 10여년 후 콜베와 베르텔로가 탄소, 수소 등의 원소로부터 직접 유기화합물을 합성해냄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러나 뵐러의 요소합성은 생기론에서 벗어나 곳곳에서 유기합성을 시도하도록 방향선회를 시켰다는 점에서 초창기 유기화학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48. 콘크리트 제조
건축 기술은 19세기에 시멘트와 강철이 사용됨으로써 현격히 발전하였다. 시멘트에 대한 특허는 1824년에 아스프딘(Joseph Aspdin)이 취득했으며, 대규모 시멘트 공업은 1850년대에 포틀런드(Potland) 시멘트가 개발되면서 시작되었다. 시멘트에 모래와 자갈을 섞고 물을 가하면 단단한 콘크리트가 된다. 한편, 1850년대부터 각종 제강법이 개발되면서 강철이 건축물에도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1899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인기를 독차지한 에펠탑은 강철이 수직 건물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기술적 전통은 철근 콘크리트(reinforced concrete)를 통해 결합되었다. 즉, 철근으로 망을 먼저 세운 다음 그 주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그 철근이 콘크리트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철근 콘크리트는 1867년에 모니에르(Joseph Monier)가 개발한 후에 지속적인 개량을 거쳐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콘크리트를 주형하는 과정에서 철근을 잡아들이는 압축 콘크리트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외벽이 얇거나 하중이 큰 건축물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콘크리트의 사용으로 가능해진 빌딩은 오늘날 대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물이 되었다. 또한, 콘크리트는 거대한 굴착 장비의 발전과 결합되어 도로나 댐과 같은 대규모 건설공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49.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탄생
1820년대에는 기하학에 있어서 대혁명이 발생하였다. 1826년 2월 로바체프스키는 유클리드의 평행성의 공리를 부정하고, 〈평행상의 직선 l 밖의 한 점을 지나서 이 평행선의 주어진 직선 l과 만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직선을 그을 수 있다〉라는 공리를 설정한 새로운 기하학이 성립한다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소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다. 헝가리의 볼야이도 로바체프스키와는 전혀 독립적으로 같은 기하학을 만들었다. 가우스도 같은 생각에 도달하여 있었지만 공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폰슬렛(Poncelet)은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1822년에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사영기하학에 있어서의 쌍대의 원리를 밝혔고, 이 논문은 오늘날 사영기하학의 한 기초를 이루었다. 몽제(Monge), 카르노(Carnot) 등의 프랑스 수학자들에 의하여 고안된 사영기하학의 연구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50.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법칙
1831년 영국의 과학자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했다. 182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나침반, 즉 자기장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패러데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석을 움직여 주면 전류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전자는 전동기의 원리이고 후자는 전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인 발전기의 원리이다. 전자기 유도법칙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발전기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전기와 자기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독특하고 중요한 물리 개념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개념과 전자기 법칙에 대한 수학적 정식화는 패러데이의 후배 물리학자 맥스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편 패러데이는 1834년 전기분해 실험을 통해 '패러데이 법칙'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전기화학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이다. 전해질 용액에 전류를 흘려줄 때 전극에서 생성되는 물질의 양은 화학 당량의 정수배가 되는데 1당량은 흘려준 전기량과 관련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기념하여 '패럿(farat)'이라는 단위로 전기분해할 때의 전기량을 표시하고 있다.
 

51. 전동기 발명
1796년 볼타가 전지를 발명함으로써 전기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이래, 1820년에 외르스테드가 전류의 자기작용을 발견하고 1831년에 패러데이가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는 등, 19세기 전반에는 전기학상의 많은 발견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견과 함께 전기의 힘으로 기계적인 작업을 하는 장치인 전동기의 개발도 다각도로 시도되었다. 이미 1821년에 패러데이는 전기를 흐르게 한 철사 주위에 자석을 회전시키는 장치를 고안한 바 있으며, 전자기유도현상이 발견된 직후에 앙페르의 기계공이었던 픽시(H. Pixxi)는 최초로 회전하는 전기발생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험실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1834년에 러시아의 기술자 야코비(M.H. von Jacobi)는 실제의 작업에 사용될 수 있는 최초의 전동기를 개발하였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전동기 40대를 하나로 묶고 320개의 전지를 사용하여 선박을 가동시켰다. 1842년에는 영국의 기술자 데이비드슨(R. Davidson)도 전동기로 선반을 가동시키고 2인승 전차를 만들어 달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의 시도는 대체로 전지를 사용한 것이어서 경제성이 떨어졌고 따라서 산업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전동기의 실용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발전기의 발달을 기다려야 했다.
 

52. 다윈의 진화론 등장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함께 다윈의 진화론은 인류의 자존심을 추락시킨 2대 이론으로 불리곤 한다. 지동설이 지구와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밀어낸 것처럼 다윈은 인간이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원숭이를 닮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격렬한 종교적, 윤리적 논쟁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윈의 이론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 자체를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인류 과학사에 큰 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다윈은 1809년 영국 잉글랜드 서부 지방인 실즈베리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1825년 에딘버러 대학에 입학했으나 의학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그는 채집과 표본 조사로 시간을 보내곤 했으며, 이후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 목사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한 후 지질학과 생물학에 깊이 매료되었다.

다윈은 1831년 영국 해군의 조사선 비글호에 승선하여 이후 5년간 세계 각지를 탐험했다. 그는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군집과 한 종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를 보고, 그처럼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은 원래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인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비글호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1837년 무렵부터 다윈은 생물이 진화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으며, 진화의 메커니즘이 '경쟁'일 것이라고 보았다. 다윈의 진화론은 19세기말에 정립된 생물학의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거대 이론의 하나로서 지금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과학 이론이다.
 

53. 사진술의 등장
1839년 프랑스의 한 화가가 세계 최초로 동판에 요오드화은을 칠한 감광판을 사용해서 사진을 찍은 이후, 1851년에는 면화약을 에테르에 녹인 코로디온을 칠한 습식 유리판이 발명되어 사진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습판 사진술은 초상 사진과 보도 사진에 적합했으며, 미국의 남북전쟁을 계기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습판 사진술은 감광성 물질이 빨리 부패되기 때문에 암실에서만 사진을 찍어야 했고, 습판을 만들어서 현상하는 과정이 매우 복잡하여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돌파해 낸 사람은 아마츄어 사진가에서 기업체의 사장으로 변신한 이스트먼(George Eastman)이다. 유리판에 유제를 칠하지 않는 건판 사진술은 1871년에 발명되었는데, 이스트먼은 이것을 개량하여 1880년에 상업화하였다. 또한, 그는 유리판을 계속해서 젤라틴 감광유제로 코팅시켜 주는 기계도 발명하였다. 이러한 혁신을 통하여 전문 사진사나 고급 아마추어의 작업은 매우 간편화되었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크고 다루기 힘든 것이었으며 건식판은 과거의 습식판만큼 깨지기 쉽고 무거웠다. 이스트먼은 1885년에 롤 필름을 개발하고 두루마리 필름걸이 시스템을 발명함으로써 유리판을 사용하던 기존의 시스템을 대체하였다. 그는 1888년 롤 필름을 사용하는 코닥이라는 간단하고 값싼 카메라를 개발하여 대중 시장에 접근하였다. "당신은 버튼만 누르세요 ― 나머지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코닥 카메라는 엄청난 부피의 사진기 세트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손쉬운 사진 촬영의 길을 터놓았다. 1888년에 이스트먼은 올해의 사진왕으로 뽑혔고, 그 해는 진정한 사진술이 발명된 해로 기록되었다.
 

54. 탄소14연대측정법 등장
아주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유적지가 하나 새로 발굴되었다. 언제적 유적인지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을까? 만약 그 유적지에서 타다만 곡식 한 알이나 무덤 속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발견된다면 연대 추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른바 탄소14 연대 측정법을 쓰면 지금으로부터 수백년에서 4-5만년 전 사이에 살았던 유기체나 그런 유기체를 가공해 만든 물체의 원래의 유기체의 사망시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 추정의 중요성이 지대한 고고학, 지질학, 지구물리학 등의 분야의 연구에 날개를 달아 준 이 탄소14 연대 측정법은 20세기 중엽인 1940년대에 방사화학의 성과에 힘입어 개발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방사화학자 리비(William F. Libby, 1908-1980)와 그의 학생들의, 탄소의 방사성 동위원소인 탄소14(14C)의 성질과 그것의 생성과정에 대한 일련의 연구에 의해 개발되었다. 탄소14 연대측정법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속의 탄소의 조성, 즉 탄소 중의 탄소14의 농도와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세포 중의 탄소의 조성은 시기와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반면, 죽은 유기체는 죽는 순간부터 몸 속의 탄소 중의 탄소14의 농도가 일정한 반감기에 따라 감소한다는 원리에 바탕을 둔 연대 측정법이다.
 

55. 외과수술의 시행
외과수술은 1800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어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우선 마취술의 개발과 발전으로 수술할 때 통증을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마취술이 없었던 시절에는 큰 수술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1840년대부터 에테르와 클로로포름의 효과를 발견하여 마취제로 사용하면서 외과수술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마취제를 사용하면 그전까지는 불가능했던 수술을 할 수는 있었지만, 수술 부위에 심한 염증이 생겨 크게 고생하거나 심지어 죽는 일이 수없이 생겨났다. 그러던 19세기 후반 파스퇴르와 코흐와 같은 생리학자들이 병원균이 감염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낸 이래, 리스터의 무균처리법을 비롯하여 소독과 멸균기술이 발전하게 됨으로써 염증 문제도 해결의 길이 열렸다.

외과수술이 해결해야했던 또 하나의 문제는 출혈이었다. 외과수술시에 출혈은 거의 필연적인 일이었는데, 출혈이 심해지면 환자는 쇼크에 빠지는 등 부작용이 생기고 생명까지 위협을 받았다. 이 문제는 란트슈타이너가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후 안전한 수혈이 가능해지면서 해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외과수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어 수많은 생명을 구해냈다.
 

56. 절대온도 개념 성립
온도라는 개념은 역학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양인 질량, 길이, 시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본적인 개념이다. 1780년에 샤를은 모든 기체는 온도가 증가하면 부피가 같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체의 부피 팽창 계수는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두 개의 고정점 대신에 하나의 고정점을 갖는 온도 스케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 아이디어로 인해 이제까지 액체를 넣어 제작해 왔던 온도계에 다시 기체가 사용되게 되었다. 기체 온도계에 대한 실험에서는 기체의 종류가 변하더라도 그에 따른 온도 스케일의 변화가 거의 미미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낮은 압력의 기체를 사용한다면, 온도계에 사용되는 물질의 종류에 의존하지 않는 온도 스케일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모든 기체는 이상기체처럼 행동하고 온도(T)와 압력(P), 부피(V)간에 아주 간단한 관계식이 성립한다.

PV=nRT      (n : 상수)

이 때의 온도를 열역학적 온도라고 하고 지금은 온도의 근본적인 측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스케일에서 0도가 자연스럽게 정의된다는 것을 주목하자. 온도가 0도가 되려면 이상기체의 압력이 0이 되어야 한다. 1933년에 국제무게질량위원회에서 이 고정점을 물의 3중점으로 받아들였다. 물의 3중점이란 물, 얼음, 수증기가 평형으로 함께 존재하는 점이다. 그 값은 273.16으로 정해진다. 이 온도의 단위는 켈빈경의 이름을 따서 켈빈이라고 하고 K로 나타낸다.
 

57. 엔트로피 법칙의 발견
19세기의 에너지 문제는 열과 일의 합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주울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열의 칼로릭 이론을 포기해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혀 있었다. 1850년 클라우지우스라는 과학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노의 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어 열기관의 열효율이 두 온도에만 관계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열은 다른 아무런 변화 없이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흐를 수도 있으며,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카르노의 원리가 증명된 것이다. 이듬해에 톰슨도 카르노의 원리를 증명했는데, 그는 그 증명을 다른 아무런 변화 없이 주위로부터 열을 흡수하는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함에 바탕했다. 이런 증명들에서 클라우지우스와 톰슨이 사용한 경험적 사실들, 또는 사실들의 경험적 불가능성이 바로 열역학 제 2 법칙의 내용이었다. 열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를 수는 있지만 낮은 온도로부터 높은 온도로는 저절로 흐르지 않으며, 일은 열로 바뀔 수가 있지만 열은 일로 바뀔 수가 없다는 것이다. 클라우지우스는 1850년 이후 오랫동안 열역학 제 2 법칙의 더 일반적이고 완전한, 그리고 수학적으로 정리된 표현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그 후 15년에 걸친 이 같은 클라우지우스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졌다. 클라우지우스는 한 가지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물리적 양을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일에 집중했고, 15년의 끈질긴 노력 끝에야 비로소 그는 그처럼 항상 증가하는 양을 정의할 수 있었다. 이 양에 엔트로피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에너지'라는 단어와 되도록 유사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58. 베세머 제강법 등장
19세기 중반에 산업 혁명이 진행되면서 철을 대량으로 생산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1856년에 영국의 발명가 베세머가 해결했다. 그는 전로에 녹은 무쇠를 주입하고 공기를 불어넣어 용융강을 만드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방법을 따르게 되면 선철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규소, 망간, 탄소가 산화되면서 선철이 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산화열이 강을 용융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베세머법은 생산성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10톤의 철을 정련하려면, 기존에 사용하던 정련로와 퍼들로로는 각각 3주와 3일이 걸리던 것을, 베세머법에서 사용하는 전로로는 10-20분 정도가 걸릴 뿐이었다. 그러나 베세머법은 종래의 연철 생산법보다 훨씬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이 실용화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베세머법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후 공학 분야에서 구조 재료는 강철이 목재를 완전히 대신하였고, 또한 레일이나 선박, 그리고 대포 제작용의 재료도 강철로 대체되었다. 값싼 강철은 19세기 후기의 제국주의의 대양 무역과 철도, 그리고 항구의 개발과 함께 열대 식민지의 개발에 큰 도움을 주었다.
 

59. 내연기관의 등장
내연기관이라는 개념은 17세기에도 존재했지만 그 실현을 위한 본격적인 모색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이다. 프랑스의 르노와르(J.J. E'tienne Lenoir)는 1860년에 최초의 내연기관을 발명하였다. 그것은 가스와 공기의 혼합 기체가 전기 불꽃에 의해 점화되면 폭발하면서 동력을 내는 메카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르노와르 엔진은 구조가 복잡하고 연료 소모가 많아서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르노와르 엔진 이야기를 들은 독일의 오토(Nikolaus A. Otto)는 상업적 가치가 있는 엔진을 탐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흡입, 압축, 폭발, 배기의 4가지 행정으로 이루어진 오토 사이클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고, 이에 입각한 내연기관을 개발하여 1867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그 후 1890년까지 내연기관의 제조를 독점한 오토 기관은 약 35,000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러나, 르노와르 엔진과 오토 엔진은 모두 석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수송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는 1883년에 다이믈러(Gottlieb W. Daimler)가 가솔린을 원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함으로써 돌파되었다. 다이믈러의 엔진은 1885년에 각각 다이믈러의 오토바이와 벤츠(Karl Benz)의 자동차로 상업화되었다. 가솔린 엔진의 개발을 계기로 인류는 자동차와 석유에 의존하는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60. 멘델의 유전법칙 등장
멘델의 유전법칙은 아마추어 과학자의 끈질긴 노력에 의해 이룩된 인류의 큰 자산 중의 하나이다. 그의 유전법칙은 처음에는 무시되어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지만 십 여년이 지난 후 그 가치가 공인되기에 이르렀고, 오늘날 유전학의 기본적인 토대를 제공하였다. 현재 체코 공화국의 영토인 슐레지엔에서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은 수도사로서 은둔 생활을 하던 1865년 세 가지 유전법칙, 즉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 우성의 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 그의 이론은 거부당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851년부터 3년 동안 빈 대학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한 멘델은 1854년부터 14년간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그의 유명한 완두콩 실험은 이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다. 1856년부터 시작된 완두콩 교배를 통한 실험으로 그는 1865년 브륀 자연사 학회에 논문을 제출했으나 그의 연구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낙담한 그는 더 이상의 연구를 단념했다. 멘델이 죽은 지 16년이 지난 1900년 세 사람의 식물학자 드 브리스(Hugo De Vries), 코렌스(Carl Correns), 자이제네크(Erich Tschermak von Seysenegg)가 그의 논문들을 재발견했다. 이들은 멘델의 논문에 기반해 자신들의 실험 결과를 이해하고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멘델에서 비롯된 이 분야의 학문은 이후 영국의 과학자 베이트슨(William Bateson)에 의해 '유전학'이란 용어로 정착되었다. 멘델에서 비롯된 유전학은 형질을 전달하는 '유전자'가 발견되고, 급기야 1953년 왓슨과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발견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61. 대형발전기의 등장
1840년대와 1850년대에는 전지를 대체할 수 있는 전기 발생장치로서 발전기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러한 발전기들은 절연된 철사를 코일로 감아 그것이 철제 영구자석의 자기장 안에서 기계력에 의해 회전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성능이 좋은 영구자석이라도 극히 약한 자기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발전기는 효율이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

독일의 기술자이자 기업가인 지멘스(Ernest W. Siemens)가 이 한계를 돌파하였다. 그는 1856년 기존의 발전자를 개량하여 T형 이중 발전자를 제작한 후 1866년에 이 발전자를 활용하여 자기 여기 방식의 발전기를 개발하였다. 그의 발전기는 강철의 영구자석 대신에 발전기 자체에서 나오는 전류를 사용한 강력한 전자석을 사용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에는 전자석의 철심에 전류가 흐르지 않아도 적은 양의 자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코일을 돌려주면 다시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을 동력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이점도 있다. 지멘스는 발전기의 응용 분야로서 전차에 주목하였다. 그는 1879년 베를린 박람회에서 전차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지멘스의 회전목마"라는 애칭을 얻었다. 1881년에는 세계 최초의 전기철도가 대중교통기관으로서 베를린의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였고 1890년이 되자 유럽과 미국의 많은 대도시에 전차선이 구축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1882년에 에디슨에 의해 전력의 상업화가 가능해지면서 지멘스의 발전기는 공장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62. 다이나마이트의 발명
다이너마이트는 스웨덴 화학자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이 발명한 니트로글리세린을 함유한 폭약의 총칭이다. 1846년 이탈리아의 소브레로가 최초로 합성한 니트로글리세린의 폭발위력은 당시까지 사용되던 흑색화약에 비해서 매우 강했지만, 충격이나 마찰에 의해 쉽게 폭발했을 뿐 아니라 액체상태였기 때문에 취급하기가 어려웠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을 정확하게 폭발시키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여 뇌관을 발명했으며, 1866년 니트로글리세린을 고체상태로 만들기 위해 규조토에 흡수시켜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였다. 니트로글리세린의 보급으로 폭발사고가 잇따라 일어나 노벨도 동생을 잃는 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실험을 계속하여 보다 폭발력이 크고 효율적인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냈다. 그는 약 355종류의 특허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경영한 15개의 화약공장을 기반으로 모은 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에 유산으로 기증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노벨은 원래 평화주의자로서, 자신의 발명품이 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하길 바랬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는 산업자본을 이룩한 구미각국이 제국주의의 길로 접어드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63. 대서양횡단 해저전선 부설
1830년대 후기에 탄생한 전신 기술은 해저에 전선을 부설하여 대륙 간에 통신망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1848년에는 독일의 에른스트 베르너 폰 지멘스가 해저 전선에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절연체를 개발했다. 2년 후 영국의 도버와 프랑스의 칼레를 잇는 첫 번째 해저 전신 부설이 시도되었으나 실패하였고, 1851년에 두 번째 전선이 시도되어 마침내 성공하였다. 이 해저전선이 설치됨으로써, 런던과 파리의 주식거래소는 주가에 대한 정보를 당일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20년간 계속하여 전신에 이용되었다.

대서양 횡단 해저 전선은 1858년에 아일랜드와 미국 뉴펀들랜드 간에 연결되었으나 케이블의 절연 실패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최초의 성공적인 상설 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은 1866년에 놓여졌으며, 1865년에 일부가 세워졌던 또 다른 해저 전선 역시 1866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미국의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이 전선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이 사업을 주도한 사람은 미국의 자본가 C. W. 필드와 영국의 과학자 켈빈경이었다. 이 전선의 성공에 이어 세계 각지의 바다에 잇달아 전신해저전선이 부설되었다. 세계의 주요 전신 해저 전선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거의 부설되었으며, 1913년에 총 길이 52만km에 달했다.
 

64. 주기율표 완성
19세기에 많은 새로운 원소들이 추출되고 성질이 밝혀졌지만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는 산발적으로만 이어졌다. 더욱이 1860년대에 70여 가지에 이르는 새로운 원소가 발견되고 그 원소들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면서 원소들을 분류하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것이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이다.

어려서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탁월하며 비상한 지능을 자랑하던 러시아 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Demitri Mendeleev, 1834-1907)는 낱장의 카드를 통해 다양한 원소들의 기저에 버티고 있는 일련의 통일성을 찾아내었다. 그는 원소들의 원자량과 대표적 성질을 낱장의 카드에 적고 카드들을 죽 늘어놓았는데, 원자량에 따라 정렬해 보니 "원자량의 크기가 원소의 성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1869년 주기율표를 제출하였다. 주기율표를 통해 원소들의 체계를 잡은 멘델레에프는 그때까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의 존재까지 예견하였는데, 실제 이 예상은 1875년 갈륨, 1879년 스칸듐, 1885년 게르마늄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멘델레예프 외에도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이어(Lothar Meyer), 드 상쿠르투아(Alexandre-Emile Beguyer de Chancourtois) 등도 비슷한 주기율표를 발표했지만, 명쾌한 설명과 발견 원소의 성질을 과감히 예측한 점 등 때문에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가 표준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65. 맥스웰 방정식 성립
오늘날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 기술은 물론 전자기학의 모든 법칙의 기본이 맥스웰 방정식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턴 물리학과는 달리 '장(field)'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영국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 정식화한 4개의 방정식은 이후 전자기학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와 자기를 측정 가능한 단일한 힘으로 합쳤다. 이 방정식에 의해 전자기파의 존재가 예언되었고,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임이 밝혀졌다. 모든 전자기 법칙은 맥스웰 방정식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전자기학뿐만 아니라 색깔론, 천체 역학, 기체 분자 운동론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고전적 장 개념을 발전시켜 장이론과 자신의 방정식을 정식화하였다. 그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서 벗어나 전류가 흐르면 도선 주위의 공간의 성질이 바뀐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당시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믿어진 에테르를 이용해서 전자기 현상을 설명했다. 에테르의 개념은 이후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지만 맥스웰 방정식은 자연계의 가장 중요한 방정식의 대열에서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맥스웰 방정식이 제시하는 물리량의 수학적 형태가 물체의 운동에 변함없이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66. 타자기의 발명
근대 타자기의 원조에 해당하는 레밍턴 타자기는 1874년에 등장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아 박람회에 출품된 레밍턴 타자기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타자기의 확산 속도는 매우 느려 1880년까지 팔린 타자기의 수는 단 5천 대에 불과하였다. 당시로만 해도 활자로 된 글은 오직 선전 광고뿐이었고 타자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은 인격적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직장의 구체적인 일까지 산업화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하면서 타자기의 판매율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1888년에는 5만대의 타자기가 팔렸다.

타자기에 얽힌 다른 이야기는 QWERTY로 알려져 있는 자판의 배열순서이다. 레밍턴 터자기를 제작했던 숄즈(Christopher L. Sholes)는 처음에 자판을 알파벳 순으로 배열했다. 그는 글쇠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알파벳의 순서를 바꾸어 실험을 계속하다가 현재의 자판 배열을 확정하였다. 그 후 QWERTY보다 더욱 간편하고 효율적인 자판 배열이 여러 번 제안되었지만 기존의 자판 배열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기존 관행의 견고함이나 교체 비용의 막대함이 기술적 우수성을 눌렀던 것이다. 최근에는 첨단 기술 제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지배 디자인의 위력을 뜻하는 용어로 "QWERTY 경제학"이 사용되기도 한다.
 

67. 전화의 발명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바꾸어 놓은 통신 수단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전화였다. 전화의 기본 원리는 소리를 여러 가지 주파수의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원래의 소리처럼 들리도록 재생하는 것이다. 1831년 영국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금속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냄으로써 전화의 이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1861년까지는 아무도 이 원리를 이용하여 소리를 전송하진 못했다. 독일의 요한 필리프 라이스는 1876년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었다가 다시 소리로 전환하는 간단한 기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조잡해서 모든 영역의 주파수를 다 전송하지 못했고, 따라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

최초의 실용적인 전화는 미국의 엘리샤 그레이와 스코틀랜드 태생인 알렉산더 그레함 벨이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믿을 수 없게도 두 사람은 같은 날 특허출원을 냈는데, 벨이 그레이보다 두 시간 빨라서 벨에게 특허가 주어졌다. 최초의 전화 교환국은 1877년 코네티컷의 하트포드에 설치되었다. 최초로 교환국이 도시간에 연결된 것은 1883년 뉴욕, 보스턴 간이었다. 미국 외에서 최초로 교환국이 설치된 곳은 1879년 런던이었는데, 교환국에는 큰 스위치판과 그 앞에서 일하는 교환수가 있었다. 교환수는 결려오는 전화를 받고 수동으로 전화 받을 곳에 연결하였다. 동전을 넣는 공중 전화기는 1889년 하트포드의 월리엄 그레이의 특허이다. 그리고 최초의 다이얼식 전화는 1923년 프랑스의 안토니 바르네가 개발하였다. 이동 전화는 벨 전화 회사에서 개발되어 1924년 뉴욕 시경이 사용하였다. 1946년에는 최초의 상업적인 이동전화가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40년이 지나도록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1978년 벨 연구소는 미국 전화 전신 회사(AT & T)를 설립하고 지역을 육각형의 셀로 나누는 방식의 이동 전화 시스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통화자가 탄 자동차가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이동하면 자동 전환 시스템이 다른 셀로 방해 없이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것이다. 이후 셀룰러 방식의 전화 시스템은 1981년 미국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68. 전등의 발명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편리하게 쓰이는 전등은 1879년 토마스 에디슨과 영국의 조셉 윌슨 스완 경에 의해 동시에 발명되었다. 그러나 전등의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811년 험프리 데이비 경이 두 전극 사이의 방전에 의한 빛을 발견하면서부터 전등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의 가로등으로 실험적으로 설치된 것은 아크등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크등은 너무 빨리 타 버렸기 때문에 비실용적이었다. 이 문제는 적당한 전도체, 또는 필라멘트를 용기나 유리구 안에 필라멘트가 타지 않도록 산소 없이 집어넣는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스완은 최초로 전등을 개발했으나, 그 역시 전등 안을 진공으로 유지하는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에디슨이었다. 1879년 10월 21일 그는 40시간 동안 빛난 탄소 필라멘트 전등의 연구 결과를 직접 실험해 보였다. 1880년 말에는 1500시간을 견디는 16와트 전등을 만들었고, 이것을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기 기구의 역사상 가장 많은 발명을 한 발명가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1910년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의 윌리엄 데이비드 쿨리지는 전등의 수명을 크게 연장시킨 텅스텐 필라멘트를 발명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전등은 아르곤이 아트 전압이 낮은 관계로 보통 아르곤 85%와 질소 15%의 혼합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열손실을 감소시켜 효율을 좋게 하기 위해 필라멘트를 코일 모양으로 치밀하게 감아 사용하고 있다.
 

69. 전자발견
원자(atom)의 어원은 "쪼개지지 않는다"는 뜻의 그리스어다.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원자는 단단한 당구공 같은 것이며,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라고 믿었다. 1897년 영국의 조셉 톰슨은 원자 내부에 질량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밖에 되지 않고 음의 전기를 띤 아주 작은 입자, 즉 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전자와 뒤이은 원자핵의 발견은 "원자핵 주변에서 전자가 어떻게 분포하는가?" 하는 원자 구조의 문제를 낳았다. 특히 닐스 보어의 원자 구조는 최외각 전자들의 분포를 통해 화학 결합의 원리, 주기율표에서 여러 물질들이 비슷한 특성을 보이는 이유 등을 이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자의 발견은 양성자, 중성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 수많은 소립자 발견의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 소립자들을 통해 우리는 물질과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도 전자를 이용한 기술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는데, 특히 전자의 파동성에 기반한 전자현미경을 쓰면 물질 분자를 관찰할 수 있다. 또 TV의 음극관은 금속을 가열할 때 광전자가 방출되는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70. 영화의 등장
영화는 활동사진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 박물학자 마레(E.J. Marey)는 1888년에 권총형 사진기를 개량하여 감광판을 회전시켜 새의 잇따른 자세를 1초에 12회 촬영하였다. "연속기록사진장치"로 불린 마레의 카메라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영화촬영기의 모든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은 1888년에 자신의 발명품인 축음기와 활동사진을 결합하여 1초에 48장의 사진을 찍는 활동사진 카메라를 만들었다.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 불린 그의 영사기는 카메라로 찍은 음화를 양화로 만들어 구멍을 통해 직접 육안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영화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에디슨의 스튜디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의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자 미국 곳곳에서는 5센트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번창하였다. 5센트 극장은 대중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스타를 키우는 일이나 화면을 크게 하는 일에 과감히 투자하였다. 이에 반해 에디슨은 흥미보다는 교육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하였고, 스타나 화면과 같은 외형적인 것보다는 영사기의 성능을 개선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에디슨의 사업전략은 점점 소비자의 기호와 멀어지게 되어 에디슨은 "영화를 발명했지만 영화사업에서는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71. 헤르츠에 의한 전자기파 확인
1860년대 초 맥스웰은 이전까지와는 약간 다른 방식을 이용해서 오늘날에도 전자기학의 뼈대가 되는 네 개의 맥스웰 방정식을 만들어 내었다. 맥스웰이 만들어낸 방정식들을 연립해서 풀면 파동 방정식이 나오는데 맥스웰은 그 파동의 속도를 계산해내었다. 계산 결과는 전자기파의 속도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그는 전자기파가 존재한다고 예언하고, 빛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며 따라서 빛과 전자기파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맥스웰이 전자기파를 예언한 후, 1888년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는 이러한 전자기파가 존재하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는 전자기파를 발생시키는 장치(진동자)와 전자기파를 받는 장치(공진자)를 만들었다. 포물선 반사경을 사용하여 평행하게 진행하는 전자기파를 만들어 반사, 굴절, 회절, 간섭 등의 실험을 하여 전자기파와 빛이 같은 성질의 것임을 증명하였다. 이로써 맥스웰의 전자기파 방정식의 옮음이 증명되었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과 그에 따른 헤르츠의 실험은 원격적인 중심력을 기초로 한 뉴튼적 자연관을 대신하여 전자기적 자연관이 과학사상에 새로이 등장하게 함으로써 자연 인식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을 형성하였다.
 

72. 자동차 발견
자동차가 바퀴 이래 교통 수단의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명품이라는 견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동차의 기본 전제는 간단하다. 소나 말이 끄는 탈것을 하나 골라서 모터를 달아 스스로 달리는 수레로 만드는 것이다. 현대적인 자동차의 시조는 1771년 프랑스의 전쟁성 장관 니콜라스 조셉 컥넛이 만든 파르디에라고 하는 증기 동력의 삼륜차였다. 이 기계는 말이 끄는 것보다 느리고 운전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생산되지는 않았다. 역시 프랑스인인 앙드 볼르는 1873년 12인승 증기 자동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증기기관은 마차와 속도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실용적인 자동차의 발명이 있기까지는 실용적인 내연기관의 발명을 기다려야 했다. 1889년 독일의 고트리브 다임러와 빌헬름 메이바흐는 기념비적인 교통 수단을 탄생시켰다. 이 자동차는 1.5마력의 4단 변속과 2기통 휘발유 엔진으로 시속 16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었다. 또 다른 독일인 카를 벤츠도 같은 해에 휘발유로 가는 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19세기의 휘발유 자동차는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진귀한 물건으로 단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최초로 대량 생산된 자동차는 1901년 미국의 랜섬 E. 올스가 개발한 커브드 대시 올스모실이었다. 현대적인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는 일괄 조립 라인은 미국 디트로이트의 헨리 포드의 작품이다. 그는 1896년부터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었다. 1908년 모델 T 자동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이래 1927년 생산 중단할 때까지 1800만대가 넘는 자동차가 포드의 조립 라인을 빠져 나갔다.
 

73. 에너지 보존의 법칙 성립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열, 전기, 자기, 빛,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형태만 바뀔 뿐, 그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열기를 사용하면 전기 에너지가 소모되지만 이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형태만 열로 바뀔 뿐이다. 또 이 열로 물을 끓여 수증기를 발생시키고 이 수증기로 터빈을 돌리면 열 에너지는 다시 역학적 에너지로 바뀐다.

에너지 보존 법칙은 따로따로 이해되던 열, 전기, 자기, 운동, 빛 등의 현상을 에너지라는 개념을 통해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물체에 열을 가해 무엇인가를 하고 나면 그 열이 사라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임스 줄은 열이 역학적인 일로 바뀌고, 또 역학적 일은 열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열, 전기, 역학적 일 등이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어떤 것, 즉 에너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에너지 보존 법칙은 영구기관을 만들려는 오랜 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 여러 사람들을 실망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영구기관이란 한 번만 작동을 시켜주면 더 이상 외부에서 일을 해주지 않아도 그 작동이 영구히 지속되는, 따라서 연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장치를 말한다.
 

74. X선의 발견
1879년에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s)는 저압의 기체를 넣은 관에 고압의 전류를 흘리면서 알 수 없는 선이 음극으로부터 방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보통 직선으로 진행하며 자기장의 영향을 받으면 구부러졌다. 그는 이 선을 음극에서 방사되어 나오는 극히 작은 대전된 입자의 흐름이라고 생각하여 음극선(cathode ray)이라 불렀다. 1895년에 독일의 뢴트겐(Wilhelm von Röntgen)은 크룩스관을 이용하여 음극선을 금속에 부딪치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선이 방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선이 대단한 투과력을 가지고 있으며 불투명한 물체도 통과한다는 점을 알았다.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 그녀의 손을 그 선으로 찍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선이 발생하는 원인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그는 X선이란 용어를 붙였다.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 발표한 뢴트겐의 논문은 과학계, 의학계 및 일반인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X선은 인간이나 기계의 조직을 진단하기 위하여 의학계 및 산업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뢴트겐은 1901년에 노벨 물리학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한편, X선이 발생하는 원인은 당시 과학계의 중심 과제로 떠올랐고 이에 관련된 많은 연구활동은 방사능과 방사성 원소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75. 무선통신의 등장
전신과 전화는 모두 통신 기술 시대의 도약을 가져온 큰 발명품들이다. 하지만 전파의 발견은 전신이나 전화보다도 더 큰 통신의 새 시대를 열었다. 전파를 발견한 것은 1887년 독일의 과학자 헤르쯔였다. 그러나 최초로 전파를 통신에 이용하여 한 사람은 귀리엘리모 마르코니였다.

1895년 마르코니는 이탈리아 볼로냐의 자기 집 근방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무선 전파 신호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1898년 유진 뒤크리테와 에르네스트 로제는 파리 시를 가로질러 무선 송신을 하였으며, 1899년 3월 28일에는 마르코니가 영국의 도버에서 프랑스의 위메레까지 50킬로미터를 지나는 무선 통신에 성공하였다. 마르코니는 이어 2년 뒤인 1901년 12월 12일, 영국의 폴두에서 뉴펀들랜드까지 무려 33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최초로 대륙간 무선 통신에 성공하였다. 1903년 마르코니가 메사추세츠의 사우드웰포리트에 호출부호 WOC인 송신국을 세웠을 때, 봉헌식에는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에드워드 7세 국왕의 축하 메시지 교환도 있었다. 1904년 마르코니는 최초의 선박, 해변간 통신 시스템인 커나드 증기선에 무선 통신을 설치했다. 이 시스템은 1912년 타이타닉호의 참사 등 여러 해난 사고에서 인명 구조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무선 통신은 그 후로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레이저에 의한 통신이 실용화 단계에 와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앞으로의 무선 통신은 정보화 사회와 깊이 있게 맞물려 함께 시대를 선도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76. 방사능 발견
방사능이란 물질 원자가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1897년 앙리 베크렐은 우라늄 화합물에서 전에 본 적이 없는 강한 에너지가 저절로 방출되는 것을 발견했다. 곧이어 퀴리 부부는 우라늄 이외의 방사능 물질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각각 폴로늄과 라듐으로 이름지었다. 방사능의 발견은 과학적인 면에서, 또 실용적인 면에서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먼저 물리학자들은 방사능 연구를 통해 방사선의 본질, 원자핵 변환에 관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본격적인 핵물리학 연구로 이어졌고, 마침내 원자탄의 원리가 되는 인공 연쇄 핵분열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오늘날 원자핵 에너지는 무기 제작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핵 에너지는 화석 연료와 더불어 주요 에너지 공급원의 역할을 한다. 그에 따라 방사능 핵폐기물 등의 문제가 새로이 대두되기도 했다. 한편 방사능 물질들은 의학, 농업, 고고학 연구 등에도 이용되고 있다. 병원에서는 피부병과 항암 치료에 방사선을 이용한다. 방사능 동위 원소를 이용하면 유물의 연대기 측정이나 동·식물의 체내에서 일어나는 물질 대사를 추적할 수 있다. 또한 방사선을 품종개량이나 식품 보존에도 활용하고 있다.
 

77. 인간의 혈액형 발견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의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외과는 수술기법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두드러지게 진보했다. 마취술과 수술부위의 감염을 막는 무균처리법이 발달하면서 수술의 성공률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그러나 수술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출혈 문제는 해결해야 할 또다른 장벽이었다. 출혈이 심해지면 쇼크 등의 부작용이 생기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된다. 출혈이 불가피하다면 그만큼의 혈액을 환자에게 공급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있었지만, 19세기까지의 수혈은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많았다. 그 이유는 혈액형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900년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였다. 사람의 혈액은 적혈구에 어떤 응집원이 있느냐에 따라 A, B, O, AB형으로 구분되는데, 각 혈액의 혈청에는 자기 것이 아닌 응집원에 대항하는 항체가 있어 다른 혈액형의 혈액과 만나면 응집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전 시기의 수혈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 것은 바로 다른 혈액형의 혈액을 제공하여 환자의 체내에서 응집반응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란트슈타이너의 혈액형 발견 이후 수혈 때는 반드시 동일한 혈액형의 혈액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수혈의 안전성이 크게 높아졌다. 그 덕분에 심한 출혈을 하는 부상환자나 많은 출혈이 예상되는 대수술도 무사히 실시할 수 있게 되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78. 플랑크의 양자가설
20세기의 전환기에 막스 플랑크는 양자 이론을 탄생시킴으로서 물리학의 근본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플랑크가 양자를 발견한 배경에는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을 괴롭힌 '흑체 복사(blackbody radiation)' 문제가 놓여 있었다. 그가 흑체 복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용광로처럼 가열된 구멍에서 복사되는 빛은 밝은 황색에서부터 적색, 청백색 등의 여러 가지 스펙트럼을 발산한다. 1884년 스테판의 추론을 같은 해에 볼츠만이 이론적으로 설명한 온도와 복사에너지의 관계는 총에너지=σT4 라는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총에너지는 단위 면적당 단위 시간에 흑체에서 복사되는 에너지이고 T는 절대온도이다. 복사열의 성질은 순전히 온도와 파장에 달려 있고 물체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다. 즉 고전 법칙에 의하면 모든 복사 에너지를 흡수한 물체의 복사라면 열과 빛은 자외선 파장에서 방출해야 한다.

플랑크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흑체 복사를 예측하는 공식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그는 에너지는 불연속적인 단위 또는 다발로 복사된다는 가정을 사용하였다. 즉 에너지는 길이나 무게와 같이 연속적으로 어떤 값이든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플랑크 상수와 진동수를 곱한 만큼의 값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E=hν 라는 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여기서 h는 플랑크 상수이고 ν는 진동수이다. 플랑크는 1900년 12월 양자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여 양자물리학을 탄생시켰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양자설을 이용해 광전효과를 설명했고, 1913년 보어는 플랑크의 접근법이 담고 있는 폭넓은 의미를 원자모형에 이용해 원자 내부에서 전자가 양자화된 특정 궤도 상에서만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79.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심리학
"가장 기이하게 여겨지는 꿈이 가장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는 꿈이 '무의식으로 통하는 왕도'이며, 억압된 욕망이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성욕과 같은 감추어진 인간의 욕망과 콤플렉스를 세상에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근원을 성기에 대한 부러움과 거세 공포라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설명함으로써 인간의 심리 발달을 전생애적으로 보게 하였다. 프로이드는 이 주장을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착을 나타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용어로 집약하였다.

오스트리아 유태인 가정 출신인 프로이드는 의대를 졸업한 후 신경학자에서 정신 병리학자로 전환하면서 정신분석학을 창시하였다. 정신분석이라는 용어는 1896년 무렵 <히스테리 병인론>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책에서 히스테리의 주된 원인이 성욕이라고 주장하여 의사회에서 사퇴하기까지 하였다. 고독한 연구 끝에 발간된 <꿈의 해석>(1900)에서 무의식 세계를 보임으로써 프로이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일부에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이 남성우월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무의식과 충동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비판을 하고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심리학, 정신의학, 문학, 예술, 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하나의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80. 진공관 발명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교통과 통신의 혁명은 산업과 생활 양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통신 분야는 마르코니가 1890년대에 발전시킨 무선통신의 상업화와 그 뒤를 이은 여러 발명, 특히 진공관에 의해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진공관 발명의 역사는 '발명왕'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으로부터 시작한다. 1883년 그는 새로운 백열전등을 개량하는 일을 하면서, 전류가 전등의 탄소 필라멘트와 양전하된 금속판 사이의 진공 속을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현상의 대단한 실용성을 예견하지 못하고 '에디슨 효과'라는 이름만을 붙인 채 전등을 개량하는 일에만 매달렸다.

'에디슨 효과'에 주목하여 이극 진공관을 발명한 사람은 영국의 플레밍(John A. Fleming, 1849-1945)이었다. '플레밍 밸브'라 명명된 이 진공관은 흔히 다이오드라 불리기도 하는데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정류 작용'을 한다. 진정한 전자시대를 연 삼극 진공관은 미국의 발명가 드 포리스트(Lee de Forest, 1873-1961)가 발명했다. 예일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이극 진공관의 필라멘트와 금속판(양극) 사이에 제어 그리드를 삽입하여 삼극 진공관을 최초로 만들었는데, 이 장치는 신호의 '증폭'도 가능한 것이었다. 신호의 증폭이 가능해지자 통신 거리의 한계가 극복되었고, 텔레비전, 라디오 등에 응용되면서 방송 시대를 이끌어 내었다. 트랜지스터와 집적회로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모든 전자제품에는 진공관이 사용되었다.
 

81.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비행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것은 고대의 신화나 설화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인류의 오랜 꿈이자 숙원이었다. 이러한 꿈을 최초로 실현시킨 것은 1783년 프랑스의 몽골피에 형제에 의해 발명된 뜨거운 공기를 이용하는 기구(balloon)였다. 그러나 기구는 마음먹은 대로 방향을 바꾸기 힘들고 속도가 느리다는 등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 때문에 19세기의 발명가와 과학자들은 공기보다 무거운 탈것을 이용해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상상의 수준을 넘어 '조종이 가능한 동력 비행기'를 실제로 만드는 것에는 숱한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문제를 결국 해결한 이들이 미국의 윌버 라이트(1867-1912)와 오빌 라이트(1871-1948) 형제였다. 독일의 발명가인 오토 릴리엔탈의 실험 기사를 읽고 비행에 관심을 갖게 된 그들은 1896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였고, 1903년 12월 17일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키티 호크에서 최초의 동력 비행을 성공시켰다. 라이트 형제의 발명은 곧 유럽으로 건너가 주목을 끌었다. 특히 1909년에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가 자신이 만든 비행기로 영국 해협 횡단을 성공시킨 것이 계기가 되어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이내 승객과 화물을 실어나르는 상용 비행이 생겨났다. 본격적인 항공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82. 상대성 이론 등장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독립적이고, 이 둘은 원래부터 우주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똑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간이나 공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물체들 사이에는 중력법칙에 따르는 인력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고전 물리학은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했고, 천체나 대포알 같은 거시 세계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의 근원은 관측자 자신에게 있고, '3차원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 4차원 시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상대성 이론의 여러 개념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거시세계에서는 4차원 시공간의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성 이론의 큰 매력은 여러 물리 법칙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준다는 데 있다. 시간과 공간의 물리적 근원에 대해 설명할 뿐 아니라, 우주 팽창같은 거시 현상에서 극미의 원자 세계를 아우르는 통일된 이해 방식을 제공한다. 이런 이론은 매우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원자탄이 터질 때 나오는 에너지의 양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도 응용된다.
 

83. 라디오 방송의 시작
인간의 말소리를 전파에 실어보낸다는 생각은 마르코니에 의해 무선 전신이 상용화된 후 여러 과학자와 공학자들의 꿈이었다. 단순히 모스 부호를 통해 통신을 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음성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매력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꿈을 달성한 것이 바로 벨에 의한 전화의 실용화와 라디오 방송의 실용화였다.

라디오 방송은 190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브랜트로크의 해변에 위치한 연구소에서 물리학자 겸 발명가였던 레지날드 페센덴에 의해 시작되었다. 라디오 방송은 전파를 스파크에 의존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연속파(continuous wave) 기술과 전파를 증폭할 수 있는 삼극 진공관이 발명되면서 가능해졌다. 이 두 기술은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기술적 성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의 하나였다. 1906년의 역사적인 첫 방송이 있은 후 여러 해 동안 라디오 방송은 고작 무선 통신의 한 분야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1920년 11월 2일 KDKA 방송국에서 최초의 상업 방송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세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사람들의 귀와 상상력을 사로잡았고 지방 문화를 변화시켰으며 가정을 비롯한 주요한 삶의 터전에서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후 라디오 방송은 화상을 함께 전하는 텔레비전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으나, 여전히 인류의 주요한 문화이자 대중 매체로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84. 모건의 초파리 돌연변이 실험
1910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한 실험실에서 흰눈을 가진 수컷 초파리 한 마리가 태어났다. 당시에는 돋보기로 보아야 겨우 구분이 가능한 이 초파리의 탄생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유전학은 발생학 연구의 한 갈래 정도로만 인식되어 모건조차 발생과정의 돌연변이를 연구하기 위해 초파리를 도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초파리를 키울 빈 우유병과 먹이인 바나나가 뒹구는 모건(Thomas Hunt Morgan, 1866∼1945)의 실험실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돌연변이 초파리가 탄생하였고, 모건은 암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여러 돌연변이를 성을 결정하는 염색체와 흰눈 유전자와의 연관으로 설명하였다. 모건은 그해 유전자가 염색체에 존재한다는 '염색체이론(Chromosome theory)'을 <사이언스> 지에 3페이지 짜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염색체 속에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후 유전학 연구는 염색체의 구조와 복제에 집중되었으며, 결국 DNA 구조 발견으로 이어지는 현대 생물학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성 연관 돌연변이 초파리가 발견되자 모건은 제자인 스터트반트(Sturtevant)와 함께 염색체 상의 유전자들의 상대적 위치를 나타내는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다. 오늘날 유전자 연구에서 사용하는 유전자 지도가 바로 그것이며 이 업적을 기려 유전자의 상대적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를 모건이라 부른다. '파리 방'이라 불린 당시 모건의 연구실에서 연구하던 스터트반트와 뮬러(Muller), 브리지(Bridges)는 현대 유전학을 이끌어갔다. 모건은 염색체 이론 정립의 공으로 1945년 유전학자로는 최초로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다.
 

85. 초전도 현상의 발견
초전도 현상은 어떤 조건 하에서 도체의 전기 저항이 0이 되는 현상으로, 1911년 카메를링 오네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저항이 없는 초전도체는 전류가 흘러도 열을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다. 초전도체를 이용하면 적은 에너지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백금, 구리같이 전도성이 큰 도체도 저항이 0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현재의 송전에서는 에너지 손실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초전도체를 송전에 이용한다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에너지 손실 전혀 없이 전기를 보낼 수 있다.

또 초전도체로 전자석을 만들면 작은 양의 전기로도 강한 자기장을 얻을 수 있다. 철로에 전자석, 기차 바닥에는 초전도 코일을 장착하면 한 번의 전류 공급으로도 충분히 강한 자기장을 만들어 기차가 뜨게 할 수 있다. 기차가 뜨면 선로와의 마찰이 없으므로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자기부상 열차의 원리다. 문제는 초전도 현상이 주로 -256∼-245℃ 정도의 극저온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1986년, -260℃에서 초전도 현상이 관찰되었고 그후 -175℃까지 임계온도가 올라갔다. 이러한 고온 초전도체에 관한 연구 덕분에 초전도 현상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86. 대륙 이동설 등장
대륙이동설은 독일의 기상학자인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가 1912년 경에 제안한 가설이다. 그것은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세계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유럽 대륙은 원래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었다. 이 초대륙을 판게아라고 하고 북쪽을 러시아 대륙, 남쪽을 곤드와나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대륙이동설은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남극 등의 대륙까지도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 즉, 전세계는 하나의 거대 대륙과 그것을 둘러싼 바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열하여 현재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바로 대륙이동설이다.

현재 세계지도를 잘 보면 남아메리카 대륙 북부의 동쪽의 돌출부와 아프리카 대륙 적도 부근의 움푹 들어간 부분은 이상할 정도로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베게너는 이것에 착안하여 대담한 새로운 설을 제창한 것이다. 마치 그림 맞추기 퍼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에 그는 대륙이동설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남미, 아프리카 양 대륙에서 동일한 종류의 고대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었다는 것 등으로 이것이 대륙이 연결되었던 증거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다. 대륙이동설은 1920년대 말까지 활발하게 논의되었지만 그 후 1930년대에는 거의 잊혀졌다가 고지자기학(古地磁氣學)의 덕분으로 1950년 말에 새롭게 되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87. 냉장술의 발달
19세기 중엽부터 기계적 냉장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면서 각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냉장고 사업에 뛰어들었고 1920년대에는 가정용 냉장고가 시판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가정용 냉장고는 가스 흡수식과 전기 압축식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전기 압축식에서는 압축기라는 별도의 전기 펌프가 냉매의 기화와 응고를 조절하였던 반면, 가스 흡수식은 냉매가 가스 불꽃에 의해 가열되고 물에 흡수되면서 농축되는 매우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압축기로 인하여 윙윙하는 소리가 심하게 났던 전기 냉장고에 비해 가스 냉장고는 매우 조용하였고, 가스 흡수식에는 작동 부품이 거의 없어서 작동 비용도 저렴하였으며 유지 및 정비도 용이하였다.

이처럼 가스 흡수식이 매우 간단하고 편리한 기술인데도 불구하고 전기 압축식이 냉장고 시장을 석권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웨스팅하우스와 같은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충분한 자본을 바탕으로 전기 냉장고 제조업체들은 냉장고의 개발에 막대한 물적·인적 자원을 투자하였으며 적극적이고 기발한 광고 및 판촉 활동을 벌였다. 반면 가스 냉장고 제조업체들은 대부분 중소기업이어서 막대한 개발비를 적시에 공급하지 못했고, 도중에 사업을 포기하는 업체가 많아서 건전한 경쟁이 유발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등장한 전기 압축식은 지금도 지배적인 냉장고 패러다임으로 군림하고 있다.
 

88. 텔레비전의 개발
움직이는 영상을 전자기파를 이용해 먼 곳으로 전송하는 아이디어는 19세기부터 이론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고, 정지 화상을 전송하는 장치는 실제로 제작되었다. 움직이는 영상을 전기 신호로 바꾸는 데는 셀레늄의 성질이 이용되었다. 셀레늄은 1817년에 발견된 화학 원소로, 사진에서 은 화합물이 빛에 민감하듯이 이 물질의 전기 저항은 빛에 민감하게 변한다. 1884년에는 독일의 파울 니프코브가 영상을 여러 가지 강도의 평행한 선으로 바꾸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초기의 텔레비전은 영상을 셀레늄 셀을 통하여 기록하고 전송하는 과정이었다.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블라디미르 코스마 조르킨이 1924년에 발명한 이코노스코프도 텔레비전의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스코프는 영상을 캐소드 튜브의 광전지 셀에 투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셀에서는 빛의 세기에 비례하는 전류가 발생하는데, 이것을 주사하면 비디오 신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이코노스코프는 요즘 볼 수 있는 텔레비전 수상관의 직접적인 조상이다.

니프코브의 발견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지만, 최초의 실용적인 텔레비전을 만든 것은 스코틀랜드의 기술자 존 로지 베이드였다. 그는 1923년 주사선이 8개인 텔레비전의 특허를 얻었고, 1926년에는 송수신기를 선보였다. 이것은 최초의 영국 공영 방송에 사용되었다. 1927년 벨 전화 회사는 전화선을 이용하여 워싱턴에서 뉴욕으로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을 하였다. 1928년 베이드는 단파를 이용하여 런던에서 뉴욕으로 최초의 대서양 횡단 방송을 하였다. 영국 방송사는 1930년 베이드의 텔레비전이 개선되어 시장에 나오자 정기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베이드의 발명은 즉각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1939년까지는 영국에서 2만 명이 텔레비전을 시청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935년 에펠탑 위에 텔레비젼 송신기가 설치되었고, 미국에서는 1936년 RCA가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 송신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으로 인해 텔레비전의 보급이 늦어져, 온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89. 양자역학의 성립
미시 세계의 소립자들은 입자-파동의 이중성을 띠고 있으며, 에너지는 양자화되어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가 체계화시킨 양자역학은 이러한 대상의 운동을 기술하는 이론이다. 이는 우리에게 미시 세계를 이해할 이론적 틀을 제공하는 동시에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온 생각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고전역학의 체계에서는 운동방정식을 알면 그 물체의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고 결정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어떤 속도로 어떤 조건에서 출발했는지 알면, 어느 시각에 어디를 지나게 될 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는 파동방정식을 풀더라도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위치에서 소립자를 관찰할 확률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관찰을 시도한다 해도,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물질의 본성은 관찰 방법에 의존한다. 즉 빛과 입자는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지지만, 현실에서는 관찰 방법에 따라 입자나 파동 중 한가지로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양자역학의 결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는 미시 세계를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핵 에너지나 반도체의 전기적 성질에 관한 연구이다.
 

90.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
약은 인류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왔던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탄생한 귀중한 산물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20세기에 앞다투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약들 중에서도 페니실린은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희망을 안겨 준 '기적의 약'이라고 불린다. 페니실린은 영국의 세균학자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이 우연히 발견하였다. 1928년, 그는 포도상구균 계통의 화농균을 배양하다가 우연히 한 개의 배양접시에서 세균무리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는 배양접시에 곰팡이가 자라면서 세균이 자라지 못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레밍은 실험 끝에 페니실리움속에 속하는 곰팡이가 생산하는 물질이 여러 종류의 세균에 대해 항균작용을 나타냄을 확인하고 이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몇 년뒤 플로리(Howard Walter Florey, 1898-1968)와 체인(Ernst Boris Chain, 1906-1979)은 페니실린을 정제하여 결정 형태로 생산하였으며, 몇 차례의 동물실험을 통해 페니실린의 강력한 항균작용을 입증하였다. 이후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페니실린은 2차대전 때 상처의 염증으로 전장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수많은 부상병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페니실린의 개발로 인류는 항생제의 시대를 열었고 세균과의 싸움에서 강력한 무기를 얻게 되었다.
 

91. 우주의 팽창 발견
오랫동안 사람들은 우주를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득한 고대부터 지금까지 별들은 늘 그 자리에 그 모습대로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믿음은 너무나 강해서 알버트 아인슈타인같은 물리학자도 '우주상수'를 도입하는 실수를 할 정도였다.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에서 우주가 팽창한다는 결론이 나자, 그럴 리 없다며 우주가 팽창하지 않도록 우주상수를 도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학자들이 팽창 우주론을 주장했다. 마침내 1929년 에드윈 허블이 관측을 통해 증거를 찾아내자 아인슈타인도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말았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먼 과거에는 지금보다 별들이 더 가까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거의 한 점에 모여 있었을 것이다. 우주의 시작, 즉 시간의 시작이 있음을 뜻하는 이 이론이 바로 빅뱅이론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미래는 어떨까? 우주는 무한히 계속 팽창할까? 아니면 대파국이론이 주장하는 대로 언젠가는 팽창을 멈추고 수축하여 다시 한 점으로 모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대파국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한다. 팽창우주론 연구는 근본물질에 대한 이해, 자연에 존재하는 여러 힘들에 대한 이해를 한차원 높여 주었다.
 

92. 입자가속기 건설
입자가속기는 입자를 높은 속도 또는 에너지를 갖도록 가속하는 장치이다. 가속기 건설은 자연 상태보다 고에너지 입자를 보다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 자연방사능 원소에서 얻는 입자는 전자, 감마선, 알파 입자에 한정되어 있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1932년 이후로 점점 더 중요해져 가고 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러더퍼드의 실험 이후에 입자의 가속이 핵변환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최초의 가속기는 미국에서 1925년경 만들어졌다. 가속기는 가속시키는 입자가 전자인지 양성자인지, 또는 다른 입자인지에 따라 구별하기도 한다. 양성자 가속기의 대표적인 예는 미국 페르미연구소의 테바트론을 들 수 있다. 테바트론은 1983년에 가속빔의 에너지를 1TeV로 증가시켰으며, 86년에는 양성자-반양성자 충돌형 가속기로 개조하여 충돌에너지를 2TeV로 증가시켜 운영하고 있다.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는 이를 이용하여 여섯 종류의 쿼크 중 아직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톱쿼크를 찾는 노력을 게속하고 있다. 우주를 이해하고 또 입자들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물리학자들은 입자들을 더 강하게 충돌시켜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입자들을 연구하려고 한다. 이 중의 하나는 힉스보존을 찾아내는 일이다. 미국의 초전도 수퍼 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프로젝트는 취소되었고, 현재로서는 유럽의 대형 하드론 충돌기[Large Hardron Collider]가 최선의 방법이다. LHC 프로젝트에는 45개국의 4,000명의 과학자와 공학자가 참가한다. 클린턴 대통령의 과학자문은 이것은 공전의 국제적인 협동작업이라고 언급했다.
 

93. 컴퓨터 발명
인류는 오랜 옛날부터 계산을 편리하게 해주는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세기의 과학자 파스칼이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컴퓨터의 시조이다.

파스칼의 계산기는 주판과 그 원리가 비슷했지만, 톱니바퀴 열에 의해 수학적 조작을 했다는 점이 근본적인 차이이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타자기가 개발되자 계산기도 그 영향을 받아 자판을 붙여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작된 것이 펠트가 1887년 시장에 내놓은 자판형의 '컴프토미터'였다. 컴퓨터의 개발에 획기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은 정보 처리 능력을 갖춘 기계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원래 19세기 초의 배버지라는 사람이 처음 고안한 아이디어인데, 1930년에 아이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 재발견된다. 아이킨은 배버지의 기계식 대신 전기 기계식의 방식을 도입하여 실용화에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이를 펀치 카드 원리 체계와 결합함으로써 현대식 컴퓨터의 원형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이후 컴퓨터는 하버드 마크Ⅰ, 에니악과 유니박, 집적 회로 등의 발명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단일 결정에 연결 회로와 함께 집어넣은 것으로서 이후 반도체 기술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였다.
 

94. 원자로 건설
우라늄 핵과 같이 핵분열이 가능한 물질에 중성자가 충돌했을 때 물질은 붕괴하여 2개의 서로 다른 원자를 생성하고 많은 열을 생성한다. 이를 핵분열 과정이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중성자들이 새로 발생하게 되고, 이들 중성자는 다른 원자들이 연쇄적으로 분열하도록 할 수 있다. 원자로의 기본 원리는 원자폭탄과 같다. 다른 점은 원자폭탄의 경우 이러한 연쇄 반응이 제어되지 않는 반면, 원자로의 경우에는 그것이 매우 조심스럽게 제어된다는 것이다. 핵분열 과정에서는 엄청난 양의 열이 발생한다. 1파운드(0.45kg)의 우라늄이 핵분열을 할 때 생성되는 열은 석탄 1,500t을 태우는 것과 맞먹는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전력 생산을 위한 원자로에서 많은 양의 열을 생산하는 데 이용된다.

최초의 원자로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페르미에 의해 건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는 원자폭탄 제조계획인 소위 '맨해튼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1942년에 엔리코 페르미가 이끄는 물리학자 팀이 시카고 대학교의 스태그 경기장 콘크리트 관중석의 지하에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 파일'을 제작한 것이다. 그 후 1954년에는 소련에서 최초로 실용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그에 뒤이어 영국과 미국에 공업적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95. 최초의 원자탄 폭발
1905년 아인슈타인이 질량-에너지 등가법칙(E=mc2)에 의해 예언한 원자폭탄은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연쇄반응을 발견하고, 페르미가 미국 시카고대학 축구장 지하의 비밀 실험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듦으로써 가시화되었다. 급기야 '맨해턴 계획'을 통해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네바다의 한 사막에서 핵폭발 실험에 성공하자 새로운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인류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세계 각국은 원자력 발전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발전소를 대거 건설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발전량의 거의 50%를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은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핵폐기물 때문에 인류에게는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있다. 더욱이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짐으로써 인류는 전혀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쟁에서 군인은 물론 민간인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게 되었으며, 방사능으로 인해 유전적 변이가 생겨 부모 세대의 전쟁의 상처가 그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후 지속된 핵무기 경쟁으로 인간은 지구를 70번이나 초토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전면적인 핵전쟁이 발발하면 인간도 한 때 지구를 지배하다 멸종한 공룡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96. DNA구조 규명
한 생물체가 지니는 모든 형질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유전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한 사람은 멘델이었으나 그의 연구결과는 다른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30여 년이 지난 1900년 몇 명의 학자들에 의해 멘델의 연구가 재발견됨으로써 유전은 생물학계의 중심적인 탐구주제가 되었다.

이후 50여 년의 연구를 통해 유전자가 DNA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고, 이에 따라 일군의 학자들이 DNA의 구조와 기능을 밝히는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53년 케임브리지대학 캐번디시연구소의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가 염기들의 상보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중나선 구조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왓슨과 크릭의 발견은 단순히 DNA의 구조를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DNA의 복제 기제까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생물이 한 개체 또는 한 종으로서 나타내는 형질들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실체가 규명되고, 크릭이 분자생물학의 중심원리라 부른 'DNA의 유전정보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발현된다'는 사실이 확립되면서 생물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분자생물학이라는 분야가 새로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DNA를 조작할 수 있게 되면서 생명공학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97.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
1957년 10월 4일에 소련이 쏘아 올린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는 미국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과학 기술의 우위를 믿고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미사일 격차라는 참담한 현실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 1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으로 과학기술 특별 보좌관을 임명하고 기존의 과학 자문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1958년에는 연방 과학 기술 회의가 설립되어 산업계, 행정부, 대학의 핵심 인물들이 과학 기술 정책의 주요 이슈를 토론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구들은 소련과의 미사일 격차를 줄이고 더 나아가 소련을 추월하기 위한 항공 우주 기술의 개발을 크게 고무시켰다.

스푸트니크의 충격은 미국이 과학 교육 체제를 정비하는 계기로도 활용되었다. 미국의 많은 언론들은 소련에 뒤진 주된 이유를 미국의 체계적이지 못한 과학 교육에서 찾았고 급기야 미국 의회는 1958년에 국가 방위 교육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을 통하여 미국 정부는 과학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10억 달러라는 거금을 지출하였다. 그 결과 고등 교육 기관에 입학한 학생의 수는 1957년에 30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1968년에는 700만 명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또한, 초등 교육 기관에서 고등 교육 기관에 이르는 전 교육 과정에서 과학 교과목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교과 과정을 개편하기 위한 노력이 잇따랐다.
 

98. 인류의 달 착륙
1958년 소련이 지구 둘레의 궤도를 선회하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 성공시키며 우주 경쟁 시대를 선포하자, 이에 자극 받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60년대가 지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후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약속을 내걸었다. 1969년 7월 20일 미국 동부 시간으로 오후 4시 17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인 달착륙선 이글호가 달에 착륙했다.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사령선에서 떨어져 나온 이글 호는 선장 닐 암스트롱과 조종사 에드윈 앨드린에 의해 달 표면의 '고요의 바다'에 무사히 착륙했다. 오후 10시 56분 암스트롱은 4개의 연동 바퀴가 달린 착륙선의 문을 열고, 황량하고 가루처럼 흙이 뒤덮힌 달 표면 위에 조심스레 첫발을 내디뎠다. 인류가 달나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암스트롱은 텔레비전을 통해 이 장면을 시청하고 있던 약 6억 명의 지구인들에게 "오늘 나는 나의 자그마한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전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사령선을 타고 달 주위를 궤도 비행하고 있는 동안 19분 후에 조종사 앨드린이 암스트롱과 합류했다. 그는 물 한 줄기, 공기 한 줌도 없는 '고요의 바다'의 달 표면에 내디디며 '장엄하고 황량한' 기분을 표현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은 1971년 화성 궤도로 발사된 마리너 9호, 1976년 무인 우주선 바이킹 1호에 의한 화성 탐사를 촉진시킴으로써 우주의 보다 먼 곳에 대한 탐사를 활발하게 했으며, 영구히 궤도를 도는 우주 정거장을 경유하여 지구와 달 사이에서 인간과 장비를 운반하는 스페이스 셔틀 체제의 개발을 구상하게 했다. 실제 셔틀 체제가 구축되면 달이나 기타 행성을 거주지로 삼거나 태양계 밖으로의 우주 탐사 여행이 더 이상 공상과학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닌 현실로 가능해 질 것이다.
 

99. 시험관 아기 탄생
1978년 7월 25일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어머니의 몸밖에서 수정된 아기가 태어났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시험관에서 수정되었다고 해서 '시험관 아기'라 불린 루이스 브라운은 현대 의학의 기적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결혼한 부부 10쌍 가운데 보통 1쌍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있다. 불임의 원인으로는 우선 정자의 수와 운동성이 정상, 즉 1ml 안에 2천만 개 이상이어야 하고 이 가운데 60% 이상이 운동능력이 있는 것에 미치지 못할 때를 들 수 있다. 정자가 정상이더라도 남성이나 여성 어느 쪽의 문제로 난자가 생성되는 나팔관까지 가지 못하면 수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자를 가느다란 관으로 여성의 자궁에 주입하는 인공수정이나, 정자와 난자를 나팔관 끝 부분에 넣어 수정을 유도하는 나팔관수정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팔관으로 가는 길이 막혀 있거나 나팔관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다. 시험관 아기는 이런 경우에 정자와 난자를 2∼3일 동안 아예 시험관에서 키워 수정시킨 후 어머니의 자궁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이다. 생명의 수정이 시험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엄청난 충격을 준 것이다.

이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스 브라운은 어머니의 몸 속에서 자라 제왕절개로 세상에 나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8년 그녀는 어엿한 숙녀로 언론에 나와 유치원 보모나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우리 나라도 1985년 서울대병원에서 처음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였으며 세계적으로 20여 년 동안 약 30만여 명이 시험관 아기로 탄생하였다.
 

100. 복제양 돌리 탄생
영국 로슬린 연구소의 이안 읠머트 박사와 케이스 켐벨 박사는 성장한 양을 복제시키는데 성공해 그 결과를 1997년 2월 27일자 <네이처> 지에 게재했다. 1930년대 독일의 발생학자 스페만이 핵 속에 생명체 형성을 위한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고 주장한 이래 복제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진행되어 개구리나 소, 양 등을 복제해 왔다. 그러나 윌머트 박사팀의 복제는 발생초기의 수정란을 나누는 기존의 복제와는 달리 다 자란 양의 체세포를 이용한 것이어서 더욱 충격적이었다. 만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였던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성급한 언론들은 누구를 먼저 복제할 것인지에 대한 인기투표까지 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생겼다.

윌머트 박사는 6살된 양의 유방으로부터 얻은 유선 세포를 배양하고 이로부터 핵을 추출한 뒤 미리 핵이 제거된 미수정란에 이식했다. 이때 다 자란 세포에서는 수정란 세포를 발생시키는 유전 정보가 발현되지 않으므로 체세포 핵의 세포분열주기와 핵을 받을 난자의 주기를 맞추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정란은 대리모 자궁에 이식되어 돌리(Dolly)라는 복제양으로 태어났다. 윌머트 박사의 성공 이후 전세계적으로 복제 연구가 붐을 이루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복제소가 탄생하였다. 또한 인간의 체세포를 복제하여 여벌의 장기를 만들어내어 필요할 때 이식한다는 연구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대상으로 한 복제연구는 사회의 거센 반발을 낳았으며 생명공학 전반에 대한 윤리적인 검토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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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블러그 대문용 파노라마 사진 만들기

유용한정보|2008. 2. 15. 18:28
지난번 "지구를 위해 1시간 불끄기" 취재차 나가서 찍어온 시드니 서큘러 퀴 사진들을 가지고 블러그 대문용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파노라마 사진 찍을때는 삼각대도 놓고 상하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찍을때마다 서로 겹쳐야 한다는게 기본인데 그날 그냥 나갔다가 가로로 길쭉한 블러그 대문에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어 넣으면 어떨까 불현듯 생각나서 찍은 거라 삼각대 사용도 못하고  대충 옆으로 쭉 찍어 논걸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동안은 출처도 모르는 파노라마 사진을 대문에 사용해서 블러그에 들를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 졌답니다.


아래 사진들이 파노라마 사진으로 만들어 보려고 여러장 대충 찍어 온 것중에 대충 그림이 될거 같아서 골라 낸 사진들 입니다.


 

 

 


미리 파노라마 사진을 생각하고 나갔더라면 삼각대도 가지고 수평선도 더 정교하게 맞추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없쟎아 있지만, 그래서 제목 그대로 "간단히 파노라마 사진 만들기" 입니다.


그럼 저같은 사진 편집 초보자도 포토샵 같은 프로그램도 안쓰고 10분만에 만들어 본 파노라마 사진 한번 같이 만들어 볼까요?


1.사진들은 400만 화소의 보통 디카로 찍은 겁니다, 그날은 불끄기 운동 하는날이라 불빛도 평소보다 없어서 사진 원본은 빛도 조절이 잘 안되 선명하지 않으데 크기를 줄이니 그런대로 선명해 보이더군요. 삼각대를 사용하면 좋겠지만 삼각대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대충 옆으로 쭉 찍으세요, 좀더 정교한 완성을 위해서는 대충 서로 겹치게 여러개 찍어 나중에 비슷하게 연결되는 사진만 골라 사용하면 완성작이 나아 보이겠지요.


2. 원본 사진은 기본 설정으로 되어있어서 상당히 큰사진이 나오는데 나중에 편집하기 좋게 위에 사진처럼 크기를 줄였습니다. 아예 사진 찍을때 제일 작은 사이즈로 설정했으면 이거 할 필요도 없는데, 다른 목적으로 찍은 사진이라 제일 큰사이즈로 찍어 버렸어요. 사진 줄일때 Photo Resize Magic이란 공짜 소프트 웨어를 주로 사용했는데, 이번에 유용하게 써 먹었네요. 물론 블러그 대문이 아닌 멋있는 큼지막한 파노라마 사진을 위해서라면 필요 없습니다.


http://www.download.com/Photo-Resize-Magic/3000-12511_4-10500432.html?tag=lst-0-1


여기 가서 그냥 다운 받으심 되요, 프리웨어 입니다. 다운 받아 인스톨 시키시면 아래와 같은 간단한 창이 뜸니다.


1번을 눌러서 줄일 사진이 들어 있는 폴더를 놓으시고요, 2번을 눌러서 줄여진 사진 둘 폴더를 정하시면 되고요,3번을 눌러서 줄일 크기를 정해 주면 되고요, 전 블러그 대문에 들어갈 크기에 맞추어 가로 266, 세로 200 으로 놓았습니다. 그런다음 4번 Start를 눌르시면 줄여진 사진들이 2번 정해진 폴더에 저장 된답니다.



3. 그다음에는 파노라마 만드는 소프트 웨어가 필요한데 파노라마 팩토리 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다운 받으실 수 있고요.


http://www.download.com/The-Panorama-Factory/3000-12511_4-10208287.html?tag=lst-0-1


30일 트라이 버젼입니다.


인스톨 하고 나면 아래와 같이 순서대로 창이 뜹니다. 그럼 1번 임포터를 눌러서 파노라마로 붙일 사진이 들어 있는 폴더를 열고 사진을 마우스로 좌악 긁어서 파일 네임에 넣은다음 넥스트를 누릅니다.




4. 그럼 두번째 단계가 자동으로 열립니다. 뒤에 사진들이 쭉 보이지요? , 필요없는 사진들은 마우스로 댄다음  바로 위에 빨간색 X를 눌러서 지우고요, 마우스로  사진을 눌러서 파노라마가 되게 순서대로 이동 시키고요, 아래 사진들 나열이 대충 무슨 사진이 될지 보이지요? 스텝2 에서는 아래 빨간색으로 표시 한거만 체크해 주고요. 다음을 눌러 줍니다.




5. 위에서 넥스트를 누르면 알아서 3단계가 나오는데 전 다 체크 안했어요, 자동으로 색을 최상으로 조절해주는 옵션인데 이것을 사용하니 밤사진이라서 알아서 색을 밝게 조절을 해주어 밤에 찍은 사진 느낌이 안들더라고요.


6. 넥스트를 누르면 다시 4단계 창이 열리는데 아래 두군대만 체크 했습니다.





7. 위에서 넥스트를 누르면 5단계 창이 뜨고요, 아래와 같이 두곳만 체크 해줍니다.




8. 위에서 넥스트를 누르면 자동으로 파노라마 사진이 완성 됩니다. 알아서 겹치는 부분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줍니다.



9. 그럼 위에서 save final image를 눌러 파노라마 사진에 새로 이름을 넣어서 컴퓨터에 저장 하면 됩니다.




 그리고 아래에 Done을 누르시면 끝입니다.





그러면 위와 같은 완성된 파노라마 사진이 나오는데요, 보시다시피 문제는 이 소프트웨어를 구입하지 않는 이상 중간에 워터마크가 생긴답니다. 크랙파일을 쓰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처음에 사진을 넣을때 위의 3번에서 세번 연속으로 사진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연속으로 3개의 파노라마 사진이 만들어지고 워터마크는 항상 정가운데에 생기는 점을 이용하여 맨 왼쪽이나 우측 워터마크가 안찍힌 부분을 윈도우에 기본으로 있는 페인트에서 잘라서 아래와 같은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사진 찍을때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고 대충 찍어 오른쪽 아래로 기울었지만 블러그 대문으로 쓰기에는 더 운치 있어 보이는거 같고요.



요즘 좋은 카메라에는 파노라마 기능도 있고, 포토샵CS3에서 파노라마 구현이 되지만, 삼각대도 없이 놀러간 장소에 디카로 대충 찍어도 옆으로 길쭉한 블러그 대문에 쓰기에 좋은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수 있을까 하여 사진 편집에 왕초보인 저도 바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남들하고 다른 대문을 꾸미는 것도 블러깅하는 재미를 배가 시키더군요.


출처 : 호주 미디어 속의 한국  | 글쓴이 : tvbodag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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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 항소이유서

유용한정보|2008. 2. 15. 18:19


유시민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00면 00동 000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00 1동 00아파트 00동 0000호
성 명 : 유시민     생년월일 : 1900년 00월 00일
죄 명 :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 형량의 과중함을 애소(哀訴)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 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선전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 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비추어 제5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 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 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 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 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 간의 상호 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 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그치기로 하고, 현 정권의 핵심 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 사회적 갈등, 정치적 비리, 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 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 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 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 묻은 권력입니다.

현 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 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 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 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 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 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라면 단 한 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 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 동안 무려 1,300여 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 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 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정권,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 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올린 일은 중국 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 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 황정하, 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 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 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 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 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이었으므로, 조사 결과 그들이 정보원이었다고 해서 폭행까지도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 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 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추행사건 때처럼) 잇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 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 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 간에 걸친 일련의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 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 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을 겸직한 사회대 학생회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 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 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 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 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 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 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 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 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 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 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 후 1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 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 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행법’ 위반으로 형사소추 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범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 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방적인 편견의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 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 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 온 고문을 흉내 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 손 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 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 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워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 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 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 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 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 간 현 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학원 내에 경찰을 수백 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 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학원사찰을 계속해 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 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 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 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 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 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을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 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 간 현 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 명의 양심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 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 주기 위해 치러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1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 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 군 등 여러 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2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 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3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4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 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 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 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 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 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 잡았습니다. 열여섯 꽃같은 처녀가 매 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 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본부 특수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 공소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 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 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학적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 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면서 대학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학생 복교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학생 겸 구속학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폭력과격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 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여, 민주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이야말로 가위 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민중항쟁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 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유 시  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Flash] http://ipopnamoo.tistory.com/attachment/XIGnZCxWQN.sw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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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역사입니다.

유용한정보|2008. 2. 15. 18:14






     우연히 지난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휘, 문장에 유심히 주의하면서 보았습니다.

    투철한 역사의식, 주체의식이 반영된 합리적 명 연설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선입견이라도 버리시고

    끝까지 봐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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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정보|2008. 2. 15.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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