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해당하는 글 2

  1. 봄의 색깔2009.04.09
  2. 봄의 색깔2009.04.09

봄의 색깔

문학이야기|2009. 4. 9. 06:04



소년은 지렁이들이 무서운 마당가 토란밭에다가 쉬를 합니다.
밤새 이슬에 젖은 토란잎 위에서 오줌은 더운 진주 구슬이 되어
또르륵 구릅니다.
척척한 땅바닥에서 붉은 댕기 같은 지렁이들이 뜨겁다는 양
몸을 꾸물거립니다.
개숫물을 부으러 나온 누이가 소년의 꼭뒤를 콕 쥐어박습니다.

"지렁이가 고추 따 묵는다."

토란밭에서 일을 볼 때마다 소년의 할머니가 하던 말을
누이는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누이 저도 지난해까지 이 토란밭에다가 쉬를 했으면서 말입니다.

"작은 시엄씨!"

소년은 입을 날름거려 약을 올립니다.
희한하게도 다른 날 같으면 한 번 더 알밤을 줄 누이가
그대로 돌아섭니다.
밤새 배앓이를 한 누이는 수척해져 있습니다.
누이는 중학생이 된 뒤로 아주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소년과 어우러져 목을 비틀고 씨름을 할 때가
오히려 누이다웠습니다,
지렁이를 발로 비벼 죽이던 그 짖궂은 가시내가
이제는 순 겁쟁이가 되어 지렁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합니다.
선머슴아이처럼

"자, 내 알통 좀 봐"

하고 팔을 걷어붙이던 그 무쇠 솥뚜껑같이 단단하던 누이가
이제는 한 달이 멀다하고 시름시름 배앓이를 합니다.
아침 밥상을 물리자 누이는 조용히 소년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쪽지를 손에 꼭 쥐어줍니다.
누이가 알려주지 않아도 소년은 무슨 심부름인 줄 압니다.
고개너머 읍내의 양품점에를 다녀오라는 것이지요.
누이가 배앓이를 할 때마다 하는 심부름입니다.
쪽지에는 소년이 모를 꼬부랑 영어가 쓰여 있지만,
소년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종이 기저귀지요.

처음 누이가 배앓이를 할 때
소년의 어머니는 빨랫줄에 하얀 기저귀를 널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랑스러워했지만 누이는 창피한 눈치였습니다.
소년은 누이에게 오줌싸개라고 놀렸습니다.
괜히 놀린 모양입니다.
누이는 종이 기저귀로 바꾸고,
그 심부름은 소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누이의 심부름은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에 비하면
아주 쉬운 편입니다.
아버지는 '환희'라는 담배를 애용하는데, 아무래도
그 '환희'라는 낱말이 소년의 입에는 익지 않습니다.
'솔'이나 '거북선', '도라지' 같은 이름이라면
외우지 않아도 척 사올텐데,
'환희'는 입에서 굴리며 가지 않으면 까먹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동구에서 동네어른을 만나 꾸벅 인사를 하거나
고갯마루에서 꿩이라도 푸드득 날아가면 잊고 말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심부름은 늘 조마조마하답니다.
그런데 누이의 심부름은 아주 간단합니다.
양품점에 가서 쪽지를 내밀면 주인 아주머니는

"누나가 보냈구나?"

하고 딱 한 마디만 묻고 신문지에 그것을 정성스럽게 싸서
소년에게 들려줍니다.
참 신통합니다.
쪽지만 보고도 누구의 심부름인 줄 아니 말입니다.



읍으로 가는 고갯마루는 무서운 곳입니다.
예전에는 여우가 나타나곤 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산신각이 있고 무당 집이 있고 그리고 폐병을 앓는
소년의 오촌당숙의 집이 있어 소년은 무섭답니다.
오촌당숙의 시렁에는 붉은 표지의 '삼국지'가
스무 권도 넘게 있답니다만, 가족은 없답니다.
당숙모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앓은 당숙은 이제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뱀도 한 솥은 더 되게 삶아먹었고 땅에서 굼뱅이도 집어먹는답니다.

소년은 당숙의 집앞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납니다.
당숙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를 할 정도입니다.
오촌당숙의 집 울타리는 사철나무로 두르고 있습니다.
당숙이 아프기 전에는 소년은 그 집 아이들과 함께 동전처럼
둥근 사철나무의 이파리를 따서 기차타는 놀이를 했습니다.

"서울까지 데려가 주세요.
서른 장 내세요.
부산까지 데려가 주세요.
스무 장 내세요.
백두산까지 데려가 주세요.
거기는 못 갑니다.
빨갱이들이 지키고 있거든요.

달나라까지 데려다 주세요.
이백 장 주세요.
거기는 토끼들이 돈을 먹고산답니다...."


사철나무 울타리는 새순이 돋아 온통 비릿한 연둣빛입니다.
울타리에는 햇볕이 듬뿍 내려와 있습니다.
소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볕이 당숙집 울타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괴물 같은 사람이 사는 집이 이토록 따뜻해 보일 수 있을까요?
어느 새 소년의 가슴엔 두려움은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스며듭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젖무덤 내음과 흡사한 비릿한 내음에 취해
그 집 사철나무 울타리 앞에서 심부름도 잊은 채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연둣빛은 소년의 몸에까지 스며든 듯합니다.

"애야!"

어디선가 불쑥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랍니다.
그곳은 사철나무 울타리 옆 장독대입니다.
거멓게 마른 오촌당숙이 옹기에 등을 기댄 채
밥그릇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에게 밥 한 그릇만 얻어다 다오."

그이는 숨도 쉬기 버겁다는 듯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놓습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지 지금 심 심부름 가요. 이따 다녀와서 갖다 드릴게요."
"그러렴. 명심해다오."

오촌당숙은 삭정이 같은 팔을 거두어 밥그릇을 땅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소년은

"네"

하곤 한 달음에 고갯길로 내삡니다.
심부름을 다녀온 소년은 동무들과 소를 몰고 들로 나갔습니다.
삐리를 뽑아 씹으며 하늘을 나는 제비를 보며 맴을 돌았습니다.
해가 짧아 원망스러울 정도로 소년은 봄볕 속을 뛰어다녔습니다.

이튿날 아침. 오촌당숙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야
소년은 당숙이 내밀던 밥그릇을 떠올렸습니다.
오촌당숙의 연둣빛 울타리 너머에서는
울긋불긋한 꽃상여가 너울거렸습니다.
여전히 볕은 그 연둣빛에 머무르는데
더 이상 비릿하고 따뜻한 내음은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행여 자신의 몸에 남아 있을 그 연둣빛을 지워내려고
엉엉 울면서 바람도 없는 길을 뛰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신문지를 똘똘 말아 화장실로 가던 누이가 깜짝 놀라워했습니다.
소년은 누이의 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누이의 품도 연둣빛 새순이 돋는지 비릿한 내음이 났습니다.
소년은 어른이 된대도 그 연둣빛이 가슴에서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전성태씨의 '봄의 색깔'이란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다운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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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색깔

문학이야기|2009. 4. 9. 06:04



소년은 지렁이들이 무서운 마당가 토란밭에다가 쉬를 합니다.
밤새 이슬에 젖은 토란잎 위에서 오줌은 더운 진주 구슬이 되어
또르륵 구릅니다.
척척한 땅바닥에서 붉은 댕기 같은 지렁이들이 뜨겁다는 양
몸을 꾸물거립니다.
개숫물을 부으러 나온 누이가 소년의 꼭뒤를 콕 쥐어박습니다.

"지렁이가 고추 따 묵는다."

토란밭에서 일을 볼 때마다 소년의 할머니가 하던 말을
누이는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누이 저도 지난해까지 이 토란밭에다가 쉬를 했으면서 말입니다.

"작은 시엄씨!"

소년은 입을 날름거려 약을 올립니다.
희한하게도 다른 날 같으면 한 번 더 알밤을 줄 누이가
그대로 돌아섭니다.
밤새 배앓이를 한 누이는 수척해져 있습니다.
누이는 중학생이 된 뒤로 아주 어른 행세를 하려고 듭니다.
소년과 어우러져 목을 비틀고 씨름을 할 때가
오히려 누이다웠습니다,
지렁이를 발로 비벼 죽이던 그 짖궂은 가시내가
이제는 순 겁쟁이가 되어 지렁이 근처에는 얼씬도 못합니다.
선머슴아이처럼

"자, 내 알통 좀 봐"

하고 팔을 걷어붙이던 그 무쇠 솥뚜껑같이 단단하던 누이가
이제는 한 달이 멀다하고 시름시름 배앓이를 합니다.
아침 밥상을 물리자 누이는 조용히 소년을 불러 세웁니다.
그리고 쪽지를 손에 꼭 쥐어줍니다.
누이가 알려주지 않아도 소년은 무슨 심부름인 줄 압니다.
고개너머 읍내의 양품점에를 다녀오라는 것이지요.
누이가 배앓이를 할 때마다 하는 심부름입니다.
쪽지에는 소년이 모를 꼬부랑 영어가 쓰여 있지만,
소년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종이 기저귀지요.

처음 누이가 배앓이를 할 때
소년의 어머니는 빨랫줄에 하얀 기저귀를 널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랑스러워했지만 누이는 창피한 눈치였습니다.
소년은 누이에게 오줌싸개라고 놀렸습니다.
괜히 놀린 모양입니다.
누이는 종이 기저귀로 바꾸고,
그 심부름은 소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누이의 심부름은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에 비하면
아주 쉬운 편입니다.
아버지는 '환희'라는 담배를 애용하는데, 아무래도
그 '환희'라는 낱말이 소년의 입에는 익지 않습니다.
'솔'이나 '거북선', '도라지' 같은 이름이라면
외우지 않아도 척 사올텐데,
'환희'는 입에서 굴리며 가지 않으면 까먹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동구에서 동네어른을 만나 꾸벅 인사를 하거나
고갯마루에서 꿩이라도 푸드득 날아가면 잊고 말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심부름은 늘 조마조마하답니다.
그런데 누이의 심부름은 아주 간단합니다.
양품점에 가서 쪽지를 내밀면 주인 아주머니는

"누나가 보냈구나?"

하고 딱 한 마디만 묻고 신문지에 그것을 정성스럽게 싸서
소년에게 들려줍니다.
참 신통합니다.
쪽지만 보고도 누구의 심부름인 줄 아니 말입니다.



읍으로 가는 고갯마루는 무서운 곳입니다.
예전에는 여우가 나타나곤 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산신각이 있고 무당 집이 있고 그리고 폐병을 앓는
소년의 오촌당숙의 집이 있어 소년은 무섭답니다.
오촌당숙의 시렁에는 붉은 표지의 '삼국지'가
스무 권도 넘게 있답니다만, 가족은 없답니다.
당숙모는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앓은 당숙은 이제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뱀도 한 솥은 더 되게 삶아먹었고 땅에서 굼뱅이도 집어먹는답니다.

소년은 당숙의 집앞을 지날 때마다 겁이 납니다.
당숙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를 할 정도입니다.
오촌당숙의 집 울타리는 사철나무로 두르고 있습니다.
당숙이 아프기 전에는 소년은 그 집 아이들과 함께 동전처럼
둥근 사철나무의 이파리를 따서 기차타는 놀이를 했습니다.

"서울까지 데려가 주세요.
서른 장 내세요.
부산까지 데려가 주세요.
스무 장 내세요.
백두산까지 데려가 주세요.
거기는 못 갑니다.
빨갱이들이 지키고 있거든요.

달나라까지 데려다 주세요.
이백 장 주세요.
거기는 토끼들이 돈을 먹고산답니다...."


사철나무 울타리는 새순이 돋아 온통 비릿한 연둣빛입니다.
울타리에는 햇볕이 듬뿍 내려와 있습니다.
소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볕이 당숙집 울타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어떻게 괴물 같은 사람이 사는 집이 이토록 따뜻해 보일 수 있을까요?
어느 새 소년의 가슴엔 두려움은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스며듭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젖무덤 내음과 흡사한 비릿한 내음에 취해
그 집 사철나무 울타리 앞에서 심부름도 잊은 채 오랫동안 머무릅니다.
연둣빛은 소년의 몸에까지 스며든 듯합니다.

"애야!"

어디선가 불쑥 소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랍니다.
그곳은 사철나무 울타리 옆 장독대입니다.
거멓게 마른 오촌당숙이 옹기에 등을 기댄 채
밥그릇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어머니에게 밥 한 그릇만 얻어다 다오."

그이는 숨도 쉬기 버겁다는 듯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내놓습니다.
소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지 지금 심 심부름 가요. 이따 다녀와서 갖다 드릴게요."
"그러렴. 명심해다오."

오촌당숙은 삭정이 같은 팔을 거두어 밥그릇을 땅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소년은

"네"

하곤 한 달음에 고갯길로 내삡니다.
심부름을 다녀온 소년은 동무들과 소를 몰고 들로 나갔습니다.
삐리를 뽑아 씹으며 하늘을 나는 제비를 보며 맴을 돌았습니다.
해가 짧아 원망스러울 정도로 소년은 봄볕 속을 뛰어다녔습니다.

이튿날 아침. 오촌당숙의 부음이 전해졌을 때야
소년은 당숙이 내밀던 밥그릇을 떠올렸습니다.
오촌당숙의 연둣빛 울타리 너머에서는
울긋불긋한 꽃상여가 너울거렸습니다.
여전히 볕은 그 연둣빛에 머무르는데
더 이상 비릿하고 따뜻한 내음은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행여 자신의 몸에 남아 있을 그 연둣빛을 지워내려고
엉엉 울면서 바람도 없는 길을 뛰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신문지를 똘똘 말아 화장실로 가던 누이가 깜짝 놀라워했습니다.
소년은 누이의 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누이의 품도 연둣빛 새순이 돋는지 비릿한 내음이 났습니다.
소년은 어른이 된대도 그 연둣빛이 가슴에서 쉬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전성태씨의 '봄의 색깔'이란
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다운 단편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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