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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을 아시나요?

음악이야기|2008. 2. 24.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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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을 아시나요. 부용꽃 이름을 가진 산, <부용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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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용 산           박기동 詩 안성현 曲  안치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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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이 산은 강원도 춘천에도 있고, 충북 충주에도, 전남 장흥에도 있는 산이다. 그리고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인 남도 땅 벌교에도 있다. 또한 ‘부용산’ 이란 애절하고 가슴을 저미는 노래도 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해방 이후 목포에서 만들어졌다는 이 노래는 꽃다운 나이에 끝내 못다 피고 시들어진 젊은 여학생을 노래하고 있다. 누가 작사자인지 누가 작곡가인지도 알지 못한 채 슬프고 가슴 아픈 이 노래는 남도 땅 아랫녘에 퍼져 나갔다.
그런데 여순반란사건이 터지고 6.25가 일어났다. ‘부용산’은 빨치산들이 지리산, 백운산 등에 숨어살면서 고향생각, 가족생각을 하며 달밤에 부르는 처연한 노래가 되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 시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금기시되어, 감히 소리 내어 부르지도 못하고 이불속에서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70년대에는 민주화를 갈구하는 운동권 사람들의 한을 담은 노래가 되었다.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밤하늘을 보면서 부른 노래였다. 황석영도 부르고, 작은 이모에게서 이 노래를 배운 김지하도 불렀단다.

마침내 1990년대 말 ‘부용산’노래의 작사자와 작곡자, 그리고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이 밝혀진다. 이 노래를 작사한 사람은 박기동, 그리고 작곡가는 안성현이다.

1947년 가을 순천 사범학교 선생이었던 박기동은 부용산에 누이동생 영애를 묻는다. 그녀는 시집간 지 2년 만에 폐결핵으로 24살의 나이에 못 다 핀 한 떨기 꽃으로 시들어져 버린 것이다. 그가 천사 같은 누이동생을 묻고 부용산 오리길을 비틀거리고 내려오면서 메모한 시가 바로 ‘부용산’이다(박기동, 부용산, 삶과 꿈, 2002).

그리고 1948년에 박기동은 목포 항도여중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한다. 거기에는 목포 앞 바다 고하도에 있었던 청소년복지시설 감화원을 배경으로 한 ‘감화원 설계’를 써서 전국 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탄 천재문학소녀 김정희가 있었다. 여중 3학년이었던 그녀는 그해 10월 폐결핵으로 죽고 만다.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녀를 산에 묻고 온지 얼마 안 되어 이 학교 음악교사 안성현은 박기동 선생의 서랍에서 부용산 시를 가져다가 작곡을 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노래가사와 곡을 고쳐서 노래를 완성하게 된다.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내용이 추가되었고,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대목의 푸르러 푸르러는 상여소리 곡조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김정희의 항도여중 1년 선배인 배금순에 의해 불리어졌고, 그 당시 학교를 다니던 학생 사이에서는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로 목포에서 해남, 벌교, 광주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6.25가 일어나자 안성현은 월북을 하게 된다. 작곡가가 월북했으니 이 노래가 ‘금지곡 아닌 금지곡’이 되었음 직도 하다. 박기동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좌익으로 몰려 학교 선생도 그만두고, 감시당하고 살면서 이 일 저 일을 하였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내와도 사별하고 1993년에  호주로 이민가 혼자 살다가 2005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이 노래는 1948년 이후 50년 동안 내내 1절만 불리어졌다. 그러다가 1998년에 연극인 김성옥 씨의 요청으로 박기동 할아버지는 호주에서 2절 노래가사를 만들었다. 박기동 씨는 2절중에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라는 대목을 짓고서는 엉엉 울었단다. ‘부용산’ 시를 지은 후 살아온 50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주체 못할 눈물이 나왔으리라.     

노래 ‘부용산’은 사랑하는 누이를 저 세상으로 보낸 월명사가 지은 향가 제망매가이요, 총명하고 어여쁜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제자가(哀弟子歌)였다. 김지하 시인의 말처럼 남도사람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던 감상(感傷)과 비탄의 노래. 남도사람들은 그렇게 동병상련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살아온 것이다.

‘목포는 항구다’의 목포에서, 태백산맥의 벌교에서, 남부군의 지리산 백운산에서, 5.18의 광주에서 ‘부용산 봉우리에/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노래하며 한을 풀어온 것이다.

글.김세곤│노동부 법무행정팀장 2006년 06월 월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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