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icon)'이자 이 시대 최고의 최고경영자(CEO)로 칭송받아온 애플의 전 CEO 스티브 잡스가 5일(현지시간) 영면했다. 향년 56세. 잡스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입양아,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서 축출과 복귀, 희귀암 발병과 투병, 스마트폰, 태블릿PC 아이폰과 아이패드 출시로 디지털시대 새 라이프스타일 창조, 화려한 프레젠테이션(PT) 등 숱한 화제와 함께 유명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그는 파산지경에 이른 애플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IT기업으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롤러코스터'와 같은 생을 마감하며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의 신화로 남게 됐다.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이 6일 오전 8시30분께 '스티브 잡스 사망'이란 속보 기사를 올린 이후 ABC뉴스, AFP통신,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영국 로이터통신 등이 관련 소식을 발빠르게 전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스티브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부모님의 집 창고에서 애플컴퓨터를 창업했다. 그는 맥북, 아이폰, 아이패드 시리즈를 개발했고 지난 8월 건강 악화로 애플의 CEO에서 사임했다.
잡스는 2003년 췌장암 섬세포암을 앓다가 수술을 받고 암세포를 없앤 후 2009년 간 이식 치료를 받았으나 암이 재발해 결국 사망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에는 3번째로 병가를 내고 애플의 경영을 팀 쿡에게 맡겼다.
다음은 애플 이사회의 성명 전문.
We are deeply saddened to announce that Steve Jobs passed away today.
Steve's brilliance, passion and energy were the source of countless innovations that enrich and improve all of our lives.
The world is immeasurably better because of Steve.
His greatest love was for his wife, Laurene, and his family.
Our hearts go out to them and to all who were touched by his extraordinary gifts.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그의 탁월함, 열정과 에너지는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든 수많은 혁신의 원천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아내 로렌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들과 그에게 특별한 혜택을 받았던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
스탠포드대 연설문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지금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순간이었지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를 하니 평소에 흥미없던 필수과목 대신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서로 다른 문자끼리 결합될 때 다양한 형태의 자간으로 만들어지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인 것이었고, 전 그 것에 흠뻑 빠졌습니다. 사실, 이 때만해도 이런 것이 제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매킨토시를 처음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아마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인쇄술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제 인생의 고비 때마다 힘이 되워줬습니다.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1년은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엄청난 일들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때로 세상이 당신을 속일지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만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살 때, 이런 문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왜냐구요?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당장 죽는 건 원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다 죽을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삶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이란 삶의 또다른 모습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지금의 여러분들은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타인의 잡음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엄지들고 차를 유혹해서 빌려타며 여행하는 것/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원문은 아래...
Stanford Report, June 14, 2005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Jobs says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당시의 사고 개요 (미국 경찰청이 보관중인 당시 사고 기록임)
●사고발생 시간: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
●경찰 구조대(케워니시의 SHEFFIELD RESCUE) 도착시간: 1시 38분
●가해자
이름: 존로서(LEWIS. JR JOHN LOTHER, 35년 7월 27일생, 운전면허번호 261-50-1680)
주소: 아이오와주 데스모이니스(DES MOINES)시 501-7
직업: 아이오와주 포리스트 애비뉴 116에 주소를 둔 회사(TRANSOL CO.) 운전수
●가해차: 74년에 만들어진 대형트럭(CA213HP103431, 모델 FREIGHTLINER)
●피해차: 이휘소박사(35년 1월 1일생, 일리노이주 글린엘렌시 쉐필드레인 251)는 75년에 만들어진 다트(DART) 승용차를 몰다 변을 당했다.
이 박사 차는 운전석과 앞 트렁크가 완전히 부서져 복구비 2천 8백 달러에 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고당시 동승자: 부인 마리안느(42세)와 아들 죠푸리(14세), 딸 아이렌(12세)이었다.
*이들은 당시 잠을 자고 있던 상태였으며, 사고후 이박사, 가해자와 함께 케워니 시립병원으로 옮겨졌다.
다음은 당시 충돌의 순간이다.
"...세계 최대 입자가속기가 있는 페르미연구소에서 서쪽으로 약 2백 Km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80번 고속도로. 길은 한산했지만, 안개가 끼고 노면이 젖어 있었다. 시속 88Km 속도로 달리던 대형 트럭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 그러나 운전사는 타이어 펑크를 알아채지 못했다.
차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바로잡으려 했고, 트럭은 다시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중앙분리대를 넘었고, 서쪽으로 달려오던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휘소는(달려오는 트럭을 피하려고) 최대한 오른쪽으로 피하려 했다고 동승한 죠푸리가 진술했다.(여기서 함께 동승했던 부인 마리안느는 바퀴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트럭 바로 뒤에서 차를 몰았던 목격자 반리스는 이렇게 진술했다. (사고트럭은 머리부분인 견인차와 몸퉁부분인 부수차 두덩이었다.) 견인차가 오른쪽으로 구부러지고 부수차는 왼쪽으로 틀어졌다. 트럭은 중앙분리대를 넘어갔다. 트럭은 승용차와 충돌하는 순간 왼쪽으로 꺾여졌다. 사고트럭 목격자의 차는 약 55마일 속도로 비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사고현장의 중앙 분리대
동행 2차선, 서행 2차선인 현장 고속도로의 중앙분리대는 양쪽 차선을 합한 것만한 4차선 정도(약 20미터)로 한가운데 깊이가 170Cm, 그곳으로부터 양쪽 차선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중앙분리대는 잔디와 잡초로 우거져 있다.
●사고현장에서의 특이점
첫째, 분리대를 넘기 시작한 지점과 충돌지점이 직선 21미터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왜 그렇게 큰 각도로 핸들을 꺾은 것일까?
둘째, 분리대가 20미터 정도 되는데도 왜 사고 대피지역인 분리대를 따라 달리다 멈추지 않고, 사고가 당연시되는 서쪽 차선으로 올라섰을까?
셋째, 서쪽 차선으로 넘어섰다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길 가장자리로까지 피한 이박사 차와 충돌했을까? (최고깊이 170Cm의 중앙분리대를 넘는 과정에서 속도가 당연히 감소하였을 것이다.)
●사고현장에 관한 두가지 견해
●단순사고사
누군가가 살인을 음모했다면 그토록 '명중'이 어려운 곳을 선택했겠는가에서 출발한다. 즉 도로구조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승용차를 가늠해 살인하기엔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같은 차선의 뒤에서 혹은 다른 주택가나 간선도로에서 얼마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텐데 성공률이 극히 적은 그곳을 선택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서로 맞은편에서 달리는데 길고 긴 고속도로에서 언제 어디에서 이박사 차가 다가오는지를 가해자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등이다.
●살인목적
누군가가 이박사를 살인할 목적을 가졌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대중적인' 교통사고로 가장 좋은 곳은 가장 의심받지 않는곳(성공률이 적어 보이는 곳)인데, 그 현장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또 사고현장과 약도를 볼 때 트럭운전수가 충분히 충돌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을텐데, '기어이' 충돌한 점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운전중인 가해자가 이박사 차를 발견하는 것은 이박사를 추적해온 제 3의 인물로부터 무전등으로 충분히 정보제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 교통사고사에 대한 의문점
첫째, 박정희가 미국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핵개발과 관련한 도움을 받으려고 이박사와 비밀접촉, 귀국을 종용했으며, 이 박사도 '결심'을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둘째, 사고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즉 사고를 알린 로이터통신의 보도가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고, 그후 누구도 상보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교통사고가 있었는가에서부터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미국 고속도로는 중앙분리대가 4차선 정도나 되는데도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바퀴가 하나 빠WU 이박사 차 앞을 때렸다."(동승한 부인 마리안느의 주장-과학동아-91.6)
"바퀴가 빠진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당했다."(78년 당시 최형섭 과기처 장관의 국회 답변)
는 등의 불확실하거나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들만이 오가고 있다.
●박순희(고 이휘소박사의 어머니) 여사와의 인터뷰 내용('말', 1993년 11월호)
-박대통령이 이박사의 아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이박사의 아들이 박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확인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과 이박사 간에 직접 편지를 주고 받진 않았습니까?
"주고 받았지요"
-그 사실을 어머니께선 어떻게 알고 계신가요. 국가원수와 핵물리학자 간의 서신왕래는 극히 비밀스러웠을텐데요.?
"사고나기 1,2년전 이박사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속에 그가 박대통령에게 보낸 답신의 사본을 동봉했더군요. 편지지 2장으로 영어와 한글을 섞어 썼는데, 내용은 '지금은 아직 귀국할 단계가 아닙니다.'였지요. 나에게 '이 편지는 역사적인 것이니 어머니 혼자만 간직하시고 절대 비밀을 지켜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사본을 아직 간직하고 계십니까?
"식구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내 책상서랍에 깊이 넣어 두었는데 이사다니면서 분실해 버려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비밀이 탄로날 위험이 있을텐데 왜 이 박사가 어머니에게 사본을 보냈을까요?
"그인 나에게만은 뭐든지 알려줬으니까요."
-그렇다면 한국의 핵개발 문제와 관련한 언질도 있었습니까?
"내가 물리에 대해선 문외한이니까 딱히 그에 대해 이야기는 없었습니다만..... 한가지 알 수 없는 대목이....." (약간의 부연을 붙이자면 이휘소박사가 동경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 박여사는 동경에서 아들을 만났다 한다. 그 자리에서 정치적인 이야기가 오간 끝에 이박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밑도 끝도 없이 이러는 거예요.
'어머니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애국잡니다.' 그말이 내 기억속에 아직 또렷한데,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이가 나에게 어떤 암시를 줬는데, 내가 모르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왜 그 말이 무슨말인지 추궁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럽습니다."
-사고 나기전에 이박사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까?
"73년 동경에서 만날 즈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내가 왜 가까운 곳까지 왔으면서 한국에 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갈 사정이 못된다'면서 나더러 동경으로 오라더군요. 74년 서울에 왔을때에도 호텔에서 자지 않고 미 8군 영내의 미 대사관저에서 잤습니다.
●강주상 교수의 '바퀴론'
이휘소 박사의 제자였던 고려대 강주상 교수는 이박사의 죽음과 관련 한가지의 판단과 두가지의 사실로 의문사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판단은 이 박사가 핵개발과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 이론물리학자였고,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박정희의 핵개발을 도우려다가 죽었다는 주장은 틀리다는 것이다.
두가지 사실은 첫째는 박정희가 이 박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친서를 보낸 사실이 없음을 부인 마리안느를 통해 확인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고 직후 스스로 사고현장에 가본 한 목격자로서의 이런 증언이다.
"맞은 편에서 오는 대형트럭의 바퀴 한 개가 떨어져 나와 중앙 분리 잔디를 건너서 일행의 차를 덮쳤다. 이 바퀴는 앞 창 유리를 지탱하는 운전석쪽의 철제 창틀에 부딪쳤고, 창틀은 운전사인 이박사의 뇌를 강타하였다."
강주상 교수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2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차량을 반대쪽 방향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려오면서 고의로 바퀴 한 개를 떨어져 나가게 하여 상대방 차를 어떻게 명중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리 불순한 의도로 누가 일부러 일으킨 사건이라도 그 성공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결국 불행하고도 우연한 단순사고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 강주상 교수의 이런 주장은 당시 미국 경찰청이 보관중인 사고기록과 현저히 다르고, 편지 교신여부는 이박사의 어머니 증언이 결정적이다.
●이동원(박정희 시대 외무부장관과 국회 외무위원 역임)
이동원씨는 92년 10월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를 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의 교통사고가 박정희의 핵개발 강행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방해공작 사이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적었다.
다음은 1993년 6월 '말'지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증거가 있나?
"단순사고 인지 살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게도 확실한 물증은 없다. 그러나 사고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나는 의문사쪽으로 생각한다."
-확실한 물증이 없다면 어떤 흔적이라도 있는가?
"흔적은 있다. 미국이 핵개발에 대해 상당한 압력을 가했는데도 박대통령은 핵개발을 위해 그 분야와 관련된 해외 한국인 학자들을 스카우트하는 공작을 했다. 이 공작에는 많은 자금이 동원됐는데, 원자력분야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분들도 다 그렇게 해서 들어왔다. 이박사는 그 분들보다도 더 박정희의 표적이 됐는데, 미국의 기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했다."
-박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이박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
"없다. 하지만 나는 당시 박정권 권부 깊숙한 부분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안들어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977년 6월 30일 국회경과위에서 신민당 고흥문의원의 제기 내용
당시 고흥문의원은 이박사의 사고기사를 보고 어떤 직감이 왔었다고 회고했다.
"이휘소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사를 보았을 적에, 이박사가 노벨물리학상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핵이론에 가장 귀중한 존재로 있었다는 점에서 본 위원은 여러 가지 지금 우리나라 사태로 보아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지 않느냐, 우리나라가 핵을 개발하게 될 경우 어쩌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박사가 아니냐, 여기에 어떤 흑막이 게재되어 있지 않느냐..."(국회 속기록 인용)
고 위원의 질문에 최형섭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의 답변은 "바퀴빠진 트레일러에 받쳐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것 이외에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최장관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하였다.
"이박사를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이 날 만한 학자는 거의 미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 사람들에 대해서 현지에서 무슨 보호를 한다든가 이러한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마는 저희들하고 긴밀한 연락을 해서 거기에 있으면서 저희들을 도와주는 사람과 또 한국에 나와서 저희들을 도와주는 이러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저희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원자력분야에 있어서도 여러 최신 지식의 축적과 공급에 비교적 긴밀한 연락 아래 피차간에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국회 속기록 인용-)
●1977년 7월 5일 '조선일보' 보도 내용
"....벤자민 리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보가 없다..... 며칠전 국회에서 단순한 교통사고냐는 질문이 마침내 나왔다. 1968년 미국시민이 되었으나 4년전 고국을 다녀간 뒤부터 '이제부터는 조국을 위해서 일할때'라고 입
버릇처럼 되뇌이었으며 그가 내년 4월 귀국할 것으로 국내 학계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소립자 이론이라지만 그것은 최근 연구 진척중이고 그가 도달한 이론에선 핵물리학 관리쯤은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라는 것, 순수한 이론 물리학자였던 미국의 오펜하이머가 사실상 2차대전중 원폭제조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재미 2백 50명의 과학자들을 위해서라도 우발사고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이휘소박사-박정희간의 교신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제자이자, 고대 물리학과 강주상 교수는 "한가지 기억나느 바는 5년전 자녀들이 우표수집에 한창 취미가 있을 때 선생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를 올려 한국우표를 선물로 받았고......" ('재미과학협회보' 제 6권 1호, 1977년 7월)
이러한 사실은 이박사가 서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 "대통령이 어떻게 두 아이의 취미를 아셨는지 아들에겐 한국우표들을, 딸에겐 전통무용책을 선물로 주셨다."는 내용이 있다.
또다른 증언으로는 '소설 이휘소'의 저자인 공석하씨가 1986년 박근혜씨로부터 들었다는 진술이 있다.
"당시 성북동 집으로 찾아가서 평소 박대통령이 이휘소씨를 알고 지냈느냐고 물었지요. 대답은 '아버님은 이박사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메모록에 이박사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는 것이었어요." (박근혜씨가 소장하고 있는 '청와대 메모'는 언론에 일부가 보도된 '청와대 일기'와는 다른 것으로 박대통령이 자필로 그때그때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고 한다.)
●오원철(당시 제 2경제수석 비서관, 핵개발 2인자로 알려져 있음)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는 핵개발 사업의 책임자는 박대통령 스스로가 맡았고, 실무를 총괄 조정한 사람은 청와대 제 2 경제수석 비서관인 오원철씨였다. 오씨는 원래 경제기획원 관공차관 이었는데 박정희의 특명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다음은 오원철씨와의 인터뷰 내용이다.(1993년 6월 '말'지)
-70년대에 박대통령이 방위산업을 육성하면서 총괄 실무책임을 맡겼다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핵개발이 방위산업의 핵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핵이 아니었다. 그런 얘기를 요새 왜 자꾸 하는지 모르겠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되고 있는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국익에 반대된다."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알고 지냈나.
"난 모른다. 그런 사람, 전혀 모른다."
-핵개발이 한창때였던 70년대 중반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핵물리학자인데 방위산업 총책임자가 모른다면.
"아! 그분은 핵이론쪽이었다. 핵연료인 플루토늄, 우라늄보다도 더 작은 미립자, 소립자를 연구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박대통령과 이박사간에 어떤 접촉이 있었는가.
"난 모른다. 이건 노코멘트가 아니라 모르는 거다."
●이박사의 교통사고 3일 후인 77년 6월 19일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미 CIA의 청와대 도청방법
"...70년 중반께 미국 관리들은 한국 국내 정치문제뿐 아니라 한국이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어떤 비밀거래를 할는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청와대를 전자도청할 장기계획을 세웠다. 여기엔 무선 전신전파방식이 사용됐는데, 도청의 대상이 되는 방안에 사전에 어떤 장치를 할 필요가 없었다. 무선전파를 그 방쪽으로 비춰 서서히 이동시키면 진동하는 소리나 잡음에 부딪칠 경우 그것을 포착, 그대로 송신신키는 것이다. 이 전파는 전파 발사장소와 도청대상간에 장애물이 있어도 관계없으며, 벽과 유리를 통과한다......"
●"청와대에서 있었던 핵개발에 대한 논의내용을 미국측이 우리 정부측에 들이대면서 핵개발 포기를 종용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내용을 도청 아닌 방법으로 어떻게 알아냈겠습니까."(1992. 4. '월간조선' -박정희의 큰딸 박근혜씨의 증언 내용중)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정책은 3단계로 나뉜다. 즉 구상기(74.12 - 77.3), 결정기(77.3 - 78.4), 수정폐기기(78. 4 - 80)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구분이 박정희가 핵개발을 구상, 결정하고 전두환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것을 폐기하는 3단계와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핵개발 의사
1975년 6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박정희는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을 갖추고 있으나, 지금을 개발을 하고 있지 않다. 만일 미국이 핵우산을 걷어가면 한국은 핵무기를 개발하게 될 것이다."
●1977년 5월 17일 '뉴욕타임즈'
"포드재단의 최근 연구보고서는 한국이 핵탄제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응하여 핵확산방지를 위해 카터 대통령이 집중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1977년 5월 22일 박정희가 청와대 공보비서관 선우련씨에게 한 말,
"이번에 하바브(미국무차관)가 오면 핵을 가져 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텐데 가져 가겠다면 가져 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가 개발할 생각이오."
●1977년 6월 10일 미하원 외교위 비밀청문회
하비브 국무차관과 브라운 합참의장은 한국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도 지상군과 함께 4-5년 안에 철수할 것이라고 철군정책을 재차 확인했다. 이 비공개회의에서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갖출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에 대한 논의가 주의제였다. 미국이 무길르 철수하면 한국은 자위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박동진 외무부장관 발언에 대한 진의와 농도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이휘소가 사고를 당할 당시의 CIA 국장은 부시 전 대통령이었다. 부시의 CIA에 대해 백악관과 국무성, 국방성 관리들은 '정치적 예언의 정확도'에 D학점을 줬지만, '고도로 기술적인 군사정보 능력'에 있어서는 A학점을 주었다.('타임', 75.6.20) 예나 지금이나 핵확산방지는 CIA의 3대 임무중 하나로 알려질 정도로 중대한 것이다.
그즈음 핵정보에 대한 CIA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74년 3억5천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심해탐색선을 만들어 핵정보 수집에 나섰던 예는 그 열성을 잘 보여준다. CIA는 소련 핵잠수함이 68년 태평양에서 침몰, 바다밑으로 가라앉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소련의 핵암호, 핵전략계획을 얻기위해 심해탐색선 글로마익스플로러를 극비리에 만들어 침몰 잠수함의 일부를 인양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부 의원들은 막대한 비밀경비에 대한 지적을 했다.
그리고 당시 CIA는 약 7백만명의 내외 사찰명단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미국내 사찰 대상자는 11만 5천명이었다. 또 CIA는 겉봉을 뜯지 않은 채 중요 사찰대상자의 우편물을 검사해 왔다. CIA가 만약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박정희-이휘소간 비밀교신 혹은 비밀간접접촉을 체크해 그 내용을 알아내고자 했다면 그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We've just learned Michael Jackson has died. He was 50. 마이클이 막 50에 저 세상에 갔다
Michael suffered a cardiac arrest earlier this afternoon at his Holmby Hills home and paramedics were unable to revive him. We're told when paramedics arrived Jackson had no pulse and they never got a pulse back. 마이클은 오늘 오후에 자신의 Holmby 힐스의 자택에서 심장 마비로 아프다가 구급대의 소생술도하지 못했다. 구급대가 도착했을때 잭슨은 맥박이없었고 결코 다시 맥박이 뛰지 않았다.
A source tells us Jackson was dead when paramedics arrived. A cardiologist at UCLA tells TMZ Jackson died of cardiac arrest. 한 소식통은 잭슨 구급대가 도착 할 때 죽었단다. UCLA의전문가는 TMZ기자에게 잭슨은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고 말 했다.
Once at the hospital, the staff tried to resuscitate him but he was completely unresponsive. 병원에서 소생술을 함 해봤는데 이미 회복 불능..
We're told one of the staff members at Jackson's home called 911. 911를 부른 마이클 직원은 마이클 죽음이 아려진후 도망갔다??? La Toya ran in the hospital sobbing after Jackson was pronounced dead.
Michael is survived by three children: Michael Joseph Jackson, Jr., Paris Michael Katherine Jackson and Prince "Blanket" Michael Jackson II.Michael Jackson's LA shopping spree. 마이클은 입양한 3명의 자녀 ....가 있다
We've just learned Michael Jackson was taken by ambulance to a hospital in Los Angeles ... and we're told it was cardiac arrest and that paramedics administered CPR in the ambulance ... and it's looking bad.
He was picked up at his home around 20 minutes ago -- we're told his mother is on the way to visit him.
01. Billie Jean 02. The Way You Make Me Feel 03. Black Or White 04. Rock With You 05. She's Out Of My Life 06. Bad 07. I Just Can't Stop Loving You 08. Man In The Mirror 09. Thriller 10. Beat It
11. The Girl Is Mine 12. Remember The Time 13.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14. Wanna Be Startin' Somethin' 15. Heal The World 16. Blame It On The Boogie (Jacksons) 17.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 18. Don`t Stop `Till You Get Enough 19. Off The Wall 20. Rock With You
21. She`s Out Of My Life 22. Can You Feel It
23. The Girl Is Mine (with
Paul McCartney) 24. Billie Jean 25. Beat It 26. Wanna Be Startin` Somethin` 27. Human Nature 28. P.Y.T (Pretty Young Thing) 29. I Just Can`t Stop Loving You (with Siedah Garrett) 30. Thriller
31. Bad 32. The Way You Make Me Feel 33. The Man In The Mirror 34. Dirty Diana 35. Another Part Of Me 36. Smooth Criminal 37. Leave Me Alone 38. Black Or White 39. Remember The Time 40. n The Closet
41. Who Is It 42. Heal The World 43. Will You Be There 44. You Are Not Alone 45. Earth Song 46. They Don`t Care About Us 47. You Rock My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