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 당연지정제에 해당하는 글 2

'식코(Sicko)'의 눈물

시사이야기|2008. 4. 14. 07:26
돈없는 환자에게 미국은 지옥 건강보험 문제 남의 일 아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의사들이 실직하고 있어요. 의술을 펼칠 기회도 없습니다." 스크린이 열리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의술을 펼칠 기회를 잃은 것은 의사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자들이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해 건강과 생명을 지킬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실직한 사람도 그들이 아니다. 막대한 병원비를 대느라 파산한 환자들이다. 총선 기간 국내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 이야기다.

릭은 나무를 자르다 전기톱에 중지와 약지가 잘렸다. 병원에서는 접합하는데 중지 6만 달러, 약지 1만2000달러라는 견적을 내놨다. 돈이 없는 릭은 '상대적으로 값싼' 약지를 선택하고, 중지는 포기했다. '백수' 애덤은 집에서 찢어진 무릎 상처를 직접 꿰맨다. 10바늘이 넘는다. 바느질 솜씨가 많이 해본 듯 능숙하다. 미국 인구 3억 명 중 50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다.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 보험사들은 수천 가지 병명과 이유를 들어 시쳇말로 '돈이 안되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보험가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험에 든 나머지 사람은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험회사는 환자 치료거부 실적에 따라 직원들에게 보너스와 승진을 베푼다. 청부업자는 보험 계약서의 허점과 피보험자의 과거 병력을 들춰내 보험금 지급 기대에 부푼 환자의 목줄을 저승사자처럼 죈다.

교통사고를 당한 로라는 앰뷸런스 비용을 직접 물어야 했다. 사전에 보험회사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거다. 로라는 분노에 차서 묻는다. "내가 언제 물어봐야 하나요. 정신을 잃고 앰뷸런스에 실려가기 전에, 아니면 실려가면서?" 22살의 아드리안은 경부암 치료를 거부당했다. 보험사의 이유는 이렇다. "22살은 경부암에 걸리기에는 너무 젊다!"

세계 의료보건순위 37위, 한 해 1만8000명이 보험이 없어 사망하는 나라, 영국 캐나다 프랑스보다 평균수명이 짧고 쿠바보다 영아사망률이 높다는 나라, 미국의 지옥 같은 보건의료제도를 이야기하려고 영화 내용을 길게 소개한 것은 아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도 닥칠 것 같은 염려에서다. 이명박 정부의 수상한 움직임 때문이다. 더구나 총선을 통해 국회까지 장악했으니 불안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선거로 시끌벅적한 지난달, 기획재정부는 영리의료법인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확대를 위한 공·사보험 정보 공유 등 세부안을 마련해 올해 관련 법 개정을 마치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법제처도 시민사회가 '영리병원 도입 전단계'로 인식해 반대하는 '의료채권발행에 관한 법률'을 6월 국회에서 처리할 주요법안으로 보고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침묵하고 있는데 외곽 부처들이 나서는 형국이다. '교묘하게 외곽을 때리는' 것 같은 정부의 이런 움직임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대선 앞뒤로 이명박 후보 또는 당선자가 "모든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거나 "보건의료산업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겠다"고 공언한 데 따른 것이다.

대통령이 폐지하겠다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무얼까. 아프면 집앞 개인병원이건, 길 건너편의 종합병원이건, 먼 곳의 대학병원이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제도 덕이다. 그런데 당연지정제가 '임의지정제'로 바뀌면 병원들은 '쥐꼬리만한 보험료'를 내고 부자들하고 똑같은 의료혜택을 누리는 가난한 환자들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부자들은 건강보험에서 대거 민영의료보험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건강보험은 재정악화로 의료보장 범위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기획재정부 계획대로 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환자들의 질병통계자료까지 민영보험회사에 넘겨주면 그들은 미국처럼 환자들의 치료비 지불을 거부할 칼자루를 쥐게 된다.

극단적인 시나리오 같은가. 그렇지 않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적 의료보험의 실질적 보장 비율은 50% 정도에 불과하다. 이미 암이나 백혈병 같은 중대질환은 민간보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됐다.

식코(Sicko), 미국 속어로 환자라는 말이다. 돈 없는 식코들에게 미국은 지옥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돈 많은 1%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에게는 피눈물이 쏟아질 재앙이 되리라는 게 개인적 판단이다. 배가 부를 곳은 미국처럼 보험사와 병원이 될 터이다. '식코의 눈물', 태평양 건너 미국 사람들만의 고통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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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코(Sicko)'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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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없는 환자에게 미국은 지옥 건강보험 문제 남의 일 아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의사들이 실직하고 있어요. 의술을 펼칠 기회도 없습니다." 스크린이 열리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의술을 펼칠 기회를 잃은 것은 의사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환자들이 의술의 혜택을 받지 못해 건강과 생명을 지킬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실직한 사람도 그들이 아니다. 막대한 병원비를 대느라 파산한 환자들이다. 총선 기간 국내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 이야기다.

릭은 나무를 자르다 전기톱에 중지와 약지가 잘렸다. 병원에서는 접합하는데 중지 6만 달러, 약지 1만2000달러라는 견적을 내놨다. 돈이 없는 릭은 '상대적으로 값싼' 약지를 선택하고, 중지는 포기했다. '백수' 애덤은 집에서 찢어진 무릎 상처를 직접 꿰맨다. 10바늘이 넘는다. 바느질 솜씨가 많이 해본 듯 능숙하다. 미국 인구 3억 명 중 50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다.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 보험사들은 수천 가지 병명과 이유를 들어 시쳇말로 '돈이 안되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보험가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보험에 든 나머지 사람은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험회사는 환자 치료거부 실적에 따라 직원들에게 보너스와 승진을 베푼다. 청부업자는 보험 계약서의 허점과 피보험자의 과거 병력을 들춰내 보험금 지급 기대에 부푼 환자의 목줄을 저승사자처럼 죈다.

교통사고를 당한 로라는 앰뷸런스 비용을 직접 물어야 했다. 사전에 보험회사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거다. 로라는 분노에 차서 묻는다. "내가 언제 물어봐야 하나요. 정신을 잃고 앰뷸런스에 실려가기 전에, 아니면 실려가면서?" 22살의 아드리안은 경부암 치료를 거부당했다. 보험사의 이유는 이렇다. "22살은 경부암에 걸리기에는 너무 젊다!"

세계 의료보건순위 37위, 한 해 1만8000명이 보험이 없어 사망하는 나라, 영국 캐나다 프랑스보다 평균수명이 짧고 쿠바보다 영아사망률이 높다는 나라, 미국의 지옥 같은 보건의료제도를 이야기하려고 영화 내용을 길게 소개한 것은 아니다. 똑같은 일이 우리나라에도 닥칠 것 같은 염려에서다. 이명박 정부의 수상한 움직임 때문이다. 더구나 총선을 통해 국회까지 장악했으니 불안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선거로 시끌벅적한 지난달, 기획재정부는 영리의료법인 도입과 민간의료보험 확대를 위한 공·사보험 정보 공유 등 세부안을 마련해 올해 관련 법 개정을 마치겠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법제처도 시민사회가 '영리병원 도입 전단계'로 인식해 반대하는 '의료채권발행에 관한 법률'을 6월 국회에서 처리할 주요법안으로 보고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침묵하고 있는데 외곽 부처들이 나서는 형국이다. '교묘하게 외곽을 때리는' 것 같은 정부의 이런 움직임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대선 앞뒤로 이명박 후보 또는 당선자가 "모든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거나 "보건의료산업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는 각종 규제를 과감히 철폐하겠다"고 공언한 데 따른 것이다.

대통령이 폐지하겠다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무얼까. 아프면 집앞 개인병원이건, 길 건너편의 종합병원이건, 먼 곳의 대학병원이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제도 덕이다. 그런데 당연지정제가 '임의지정제'로 바뀌면 병원들은 '쥐꼬리만한 보험료'를 내고 부자들하고 똑같은 의료혜택을 누리는 가난한 환자들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부자들은 건강보험에서 대거 민영의료보험으로 빠져나갈 것이고, 건강보험은 재정악화로 의료보장 범위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다. 기획재정부 계획대로 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환자들의 질병통계자료까지 민영보험회사에 넘겨주면 그들은 미국처럼 환자들의 치료비 지불을 거부할 칼자루를 쥐게 된다.

극단적인 시나리오 같은가. 그렇지 않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공적 의료보험의 실질적 보장 비율은 50% 정도에 불과하다. 이미 암이나 백혈병 같은 중대질환은 민간보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됐다.

식코(Sicko), 미국 속어로 환자라는 말이다. 돈 없는 식코들에게 미국은 지옥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폐지되면 돈 많은 1%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에게는 피눈물이 쏟아질 재앙이 되리라는 게 개인적 판단이다. 배가 부를 곳은 미국처럼 보험사와 병원이 될 터이다. '식코의 눈물', 태평양 건너 미국 사람들만의 고통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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